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리바 Jul 23. 2019

뭐라도 믿고 싶어 질 때

하나님이 연락두절 상태니깐.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 이 말은 십계명의 첫마디이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 자신은 신실하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성경에선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통해서 난 그래서 부정하지 않고 신실하다 여긴다). 유일한 신을 믿는 기독교인은 타 종교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이기도 하지만 질투의 하나님이니 자신을 배신했을 때 그만큼의 저주와 벌을 준다. 사랑과 증오는 비례하니깐. 사랑했던 만큼 증오도 커지기 마련이니깐. 성경 속 하나님의 사랑을 받다가 저주를 받는 인물들을 보면 온화하고 사랑만 가득할 것 같은 하나님이 무서울 때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는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에 관해 호기심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고, 나 자신이 세상에 어떤 라인에 서 있는지 궁금한 사람이고,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잘 살고 있는지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인간인 나는 초월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계획을 잘 모른다. 어떻게 그 깊고 넓은 마음과 생각을 나라는 인간이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랑은 하지만 묵묵부답인 하나님의 사랑은 종교의 깊이가 깊지 않은 나에게 가끔은 어려울 때가 있다. 나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나의 진로는 어떻게 정해져야 할 것인지, 나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언제 죽을 것인지, 무엇을 피해야 할 것인지.

나는 오늘을 사는 나 이기도 하지만, 내일 어떻게 될진 모르지만 그래도 내일을 알고 싶은 나이기도 하다.


난 나에 대해 궁금함이 많다. 사람과 친해진 뒤 항상 궁금해했던 건 나의 첫인상과 현재의 모습이 어떤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누군가에게 듣는 나의 모습들은 나의 흥미를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나의 새로운 모습들을 발견하고 생각하고 알게 된다는 것이 좋았다.

여전히 나는 나의 의외인 나는 모르고 사람들은 아는 나의 모습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건 현재의 내 모습뿐만 아니라 미래의 내 모습도 궁금하고 항상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스쿼시의 센터가 종료하는 시점에 스쿼시장의 1세대 회원부터 끝자락 회원들까지 회식을 하게 되었다. 회식이 잡혔고, 강사가 올 사람들의 명단을 부르는데 너무나 낯선 이름들뿐이어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회식자리에서 상황을 가리고 낯을 가릴까 봐 고민을 했다.


회식 날이 되었다. 역시나 어색해서 아는 사람들을 방패 삼아 제일 끝쪽에 자리를 앉았다. 오래된 회원들은 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앉았다. 나는 내가 아는 동기들과 신나게 마지막을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나 한 언니가 와서 ‘인사를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앞으로 운동 계속할 거잖아.’라고 이야길 했다.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라는 생각에 내 자리에서 다른 테이블로 인사를 갈 이유 또한 없었다. 나는 뻣뻣하고, 싹수가 없다고 여겨도 어쩔 수 없었다. 관계를 더 이어나가거나 넓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누구의 눈치로 그 자리에 계속 있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마지막을 내가 아는 사람들과 마무리하려고 참석한 것이니깐.


그러다가 오래된 회원들이 우리 쪽 테이블로 인사하러 오는데 어색함이 묻어나는 그 자리에서 한 분이 관상과 손금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경계하는 나의 관상을 보더니 좋다고 하셨다. 그 말에 ‘어?’하면서 나는 빨려 들어갔다.

얼굴이 좋다. 얼굴관상이 너무 좋고, 눈 밑에 점은 빼라. 자식이 고생시킬 점이다.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부모님이 빼라고 빼라고 으름장 놓을 땐 뒷등으로 듣지 않던 나였는데, 나중에 자식이 고생시킬 점!이라는 말에 ‘당장!!!!’하면서 마음먹은 나라는 사람...


관상에 이어 손금까지도. 너무 좋은 말만 해주셔서 '믿지 말아야지', '한 귀로 흘려야지'했다. 우린 오늘 처음 본 사이이고,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거니깐.

그렇다고 너 빨리 죽을 거야. 너 위험해.라는 말을 듣는다면 한 귀로 흘렸을까? 생각해보니 나는 의심만 가득한 채 이분의 이야기를 내 좋은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흘려듣는 중이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니깐)


근데, 내가 결과적으로 빨려 들었던 한마디는, '주변에 남자는 정말 많은데 내 남자는 없을 상이네'라고 하셨다. 그 말에 무장해제되면서 '네! 그게 보여요?' 하면서 갑자기 그분이 말하는 말들이 귀에 쏙쏙 박히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 생각을 몇 년 동안 은연중에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요즘 들어서 나 자신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더 많이 생각하고 있었던 마음이었는데 이렇게 정확하게 처음 본 사람임에도 손금과 관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시점으로 주변에서 '얘 결혼은 할 수 있어요?' 하면서 폭풍 이야기들이 빗발쳤다.


그러면서 나는 결혼하면 잘 살수 밖에 없다는 답변과, '고집이 세다. 자기 관이 뚜렷하다. 하지만 그런 성격을 합리적이게 잘 맞춰줄 남자를 분명하게 만날 거다. 손금과 얼굴에 수많은 남자가 있지만, 본인의 남자는 단 한 명이다. 그리고 그 남자랑 끝까지 간다'라는 말에 속으로 궁금함은 조금 줄었지만, 실망스러운 생각이 더 들어버렸다. 단 한 명이라뇨!

결론적으로 나는 1-2년 안에 결혼을 하기 때문에 너무 조바심을 내며 지내지 말라는 답을 들었는데 솔직하게 그 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다시 말하지만 난 그리스도인이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응답을 구해도 대답해주지 않던 하나님 대신 인간이 나의 미래를 이야기해 주면서 그걸 듣는 내가 참 우습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기독교인인 내가 이래도 돼?' 하는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허탈함과 나름의 안도감을 느낀 두 가지의 감정이 묘하게 마음에 자리 잡혔다.

아마 나의 이런 붙잡음의 이유들은 요즘 들어서 깨가 쏟아지는 주변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에 소속감이 없는듯한 기분이 많이 들어 울적하기도 했던 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년이면 앞자리가 3이 되는데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여전히 의문인 아홉수니깐.


그래서 답을 주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고, 어찌됐건 결과론적으론 잘 가고 있음에도 내가 그 뜻을 알지 못하니깐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술 마시지 않고, 주일이며 평일에도 교회를 꼬박 나가며 하나님을 내세워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 자신과 관상과 손금 사주 등으로 수긍하는 나의 모순적인 모습들에 나는 현타가 왔다.

그동안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입으로만 신앙하고 입으로만 하나님을 찾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구나.


신앙은 자기를 부인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건데 5G 시대에, 하물며 LTE도 답답해하는 이 시대에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은 너무나 느리고 알 수 없는 존재로 자리하면서 나도 마음이 소원해지긴 했다. 여전히 나는 희망고문 같은 그 (좋은)말들을 한편에 붙잡으며 ‘난 인생이 잘 풀린다’라는 위안을 갖고 살지만 이런 위안을 질투의 하나님, 시기의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을 건데 하는 생각에 좀 두렵네..하는 두 가지의 마음이 공존한다.


어찌 됐건 나의 싱숭생숭했던 아홉수의 고민들은 계속된다.



작가의 이전글 앓는 마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