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 및 인지적 접근
일리노이에 살 무렵, 토요일마다 커먼그라운드(Commonground)에서 장을 보러 다녔다. 한국 브랜드 ‘한살림’과 비슷하게 운영되는 미드웨스트의 생활협동조합이었는데, 마치 홀푸드에서처럼 유기농 야채나 과일이라든가 채식주의자를 위한 식료품을 여기서 구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기농 및 공정무역을 내세운 브랜드의 초콜릿을 맛볼 수 있는데, 가장 저렴한 초코러브(Chocolove)부터 그린 & 블랙(Green & Black), 마데카스(Madecasse)까지 다양하다.
한 번은 이퀄 익스체인지(Equal Exchange)라는 브랜드에서 레몬-생강-후추가 든 카카오 55% 초콜릿을 맛보았는데 재미있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문득 면세점에 종종 나타나는 ‘김치 초콜릿’에도 생각이 미쳤다.
잘 어울리는지 알아보려면, 일단 김치와 초콜릿이 각각 어떤 풍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초콜릿 특유의 아로마는 카카오매스와 카카오 버터에서 나온다. 샌프란시스코를 거점으로 한 초콜릿 브랜드 TCHO의 분류표를 참조하면, 카카오매스의 풍미는 견과류(nutty), 흙내(earthy), 꽃향(floral), 목향(woody)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제조법과 첨가물에 따라 훈향(roasty) 및 향신료에 기반한 매콤함(spicy)이 가미되는데, 스펙트럼이 넓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식물 계통의 아로마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코코아버터는 지방으로, 부드럽게 녹는 맛을 담당한다. 즉 초콜릿 특유의 풍미는 식물 계통의 아로마와 식물성 지방, 이 둘이 어우러진 결과물인 것이다.
첫머리에 얘기한 레몬-생강-후추 초콜릿은 Flavor Thesaurus (Segnit, 2012. 위의 표 참조) 상에서 어디쯤일까? 레몬은 시트러스(citrus), 생강 및 후추는 매콤함(spicy)에 속할 테니 두 스펙트럼 사이 어디쯤에 놓일 것이다. 한국에선 낯설지만 미국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초콜릿의 아로마로 칠리, 넛맥(육두구), 라즈베리, 코코넛, 카카오 닙, 커피콩, 후추, 오렌지 등이 있다. 로즈메리는 뜨거운 초콜릿에 넣어 마시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식물 계통의 아로마에 속한다.
발효과정에서 증가하는 아미노산의 함량 및 들어가는 젓갈의 풍미를 고려할 때, 김치는 유황내(Sulfurous)와 해산물(Marine), 소금절이(Brine & Salt)의 선상에 가까워 보인다. 김치가 걸쳐 있는 위 세 스펙트럼은 동물 계통의 아로마에 가깝다. 아미노산에 기인한 우마미(Umami)가 특징적인 데다 지방의 함량은 낮은 편이다. 때문에 식물 계통의 아로마에 지방을 더한 초콜릿의 풍미와는 거리가 있다.
동물 계통의 아로마를 지닌 식품에서 초콜릿과 궁합을 맞춰볼 만한 식품은 베이컨인데, 베이컨이 함유한 동물성 지방은 식물성 지방인 카카오 버터와 어느 정도 맞물린다. 게다가 특유의 짠맛 역시 단맛을 북돋는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브랜드 Vosges Haut의 Mo bar가 있다. 반면 김치의 맛을 내는 젓갈은 해산물이기 때문에 동물성 지방의 풍미와는 거리가 있는 데다 발효의 신맛 역시 오렌지나 레몬의 신맛인 시트러스 계열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즉 감각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조합이 아니다.
‘디저트’로 분류되는 초콜릿과는 달리 김치는 ‘부식’으로 분류된다. 디저트에서 떠올리는 이미지가 부식 혹은 반찬에서 떠올리는 이미지와 겹쳐지는 건 쉽지 않다. 또한 동양과 서양에서 각기 풍미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즉 서양에서는 재료의 조합을 중요시 여겨 푸드 페어링(food pairing)이 발달한 반면, 동양에서는 재료 자체보다는 요리 단위로 접근을 한다. 위에 언급한 초콜릿의 부재료들과는 달리 김치는 재료(ingredient)라기보다 독립적인 요리(cuisine)로 분류된다. 베이컨 역시 독립적인 요리라기보단 아침식사 등에 쓰이는 부재료에 가까운 데다, 감각적인 차원에서도 벌써 가능한 조합이기 때문에 김치와 같은 케이스라고는 보기 어렵다.
이러한 인지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초콜릿과 김치를 조합하는 건 다른 재료들끼리의 조합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지 않다.
한국 문화를 대표하는 음식으로서 초콜릿과 궁합을 맞춰보았다고 한다면, 문화적인 상징성과 인지적 부조화가 가져오는 두드러짐 효과(saliency) 때문에라도 어느 선까지 주목을 받을 순 있겠다. 허나 이러한 부수적 효과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감각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김치와 초콜릿은 결국 취약한 조합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감귤이나 한라봉 초콜릿의 경우, 이미 많이 쓰이는 오렌지-초콜릿 조합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마케팅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면 기존의 친숙한 감각에 더불어, 감귤이나 한라봉 특유의 ‘개성적 풍미’를 강조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도 싶은 것이다.
여담 1. 개인적인 입장에서 화이트 초콜릿은 초콜릿이 ‘아니지만’, Vosges의 Amalfi bar만은 유일하게 인정하는 초콜릿. 레몬과 핑크 페퍼콘의 조합인데, 검은 후추에 비해 가볍고 단맛이 있으며 섬세한 가향 탓에 레몬과 절정의 궁합을 보여준다.
여담 2. 거의 모든 종류의 견과류/말린 과일은 초콜릿과 좋은 궁합을 이룬다. 유명한 브랜드 ‘모차르트’는 아몬드 가루에 설탕을 섞어 만든 마지팬(Marzipan)으로 속을 채운다. 하와이로 휴가 다녀온 사람들이 사 오는 건 마카다미아 초콜릿이다. 그중에서도 아몬드와 검은 체리(bing cherry)는 가장 대표적인 조합이다. 게임 ‘포탈’에 등장하는 케이크 (참고로 저 사진 속 케이크는 제가 구운 겁니다. 레시피 주인에게 보내어 인증했더니 영예롭게도 홈페이지에 올려 주셨음.)의 전신은 블랙 포레스트인데, 초콜릿과 체리(및 체리 리큐르)의 조합으로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참고문헌:
샌프란시스코의 초콜릿 브랜드 TCHO의 홈페이지: http://www.tcho.com/tchois/flavor-focus/
브랜드 “Vosges Haut”의 베이컨-초콜릿 바: https://www.vosgeschocolate.com/category/bacon_and_chocolate
Ahn, Y. Y., Ahnert, S. E., Bagrow, J. P., & Barabási, A. L. (2011). Flavor network and the principles of food pairing. Scientific reports, 1.
Segnit, N. (2012). The Flavor Thesaurus: A Compendium of Pairings, Recipes and Ideas for the Creative Cook. Bloomsbury Publishing 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