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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tensia Sep 18. 2019

맛을 아는 법

테라로사 풀문 블렌드

안암 보헤미안, 포항 아라비카, 경희궁 커피스트, 강릉 테라로사. 내 마음속 한국 커피집의 사대천왕이다. 테라로사는 언제부턴가 서울 곳곳에 지점이 생긴 덕분에 다니기 수월해졌다. 좋은 일이다. 광화문 지점이라면 통유리 앞에 앉아 맞은편의 연합뉴스 헤드라인을 바라보는 일 또한 별미다. 


어디건 콩 볶는 집에 오면 원두가 든 봉지에 쓰여 있는 설명을 유심히 읽어 본다.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게 생겼는데 복숭아, 초콜릿, 레몬, 감초, 치자 향이 난다고 한다. 열어볼 도리 없는 조개 속 진주처럼 반짝이는 낱말은 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렇게 다양한 맛은 누가 어떻게 알아냈을까? 


그보다, 정말인가? 커피를 내리면 과연 봉지에 적혀 있는 모든 맛이 나는 걸까? 흡사 소설에 나오는 마법사의 사탕콩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저 맛을 모두 느껴볼 수 있을까?


올해 테라로사는 이른 추석을 염두에 두었는지 '풀문 블렌드'라는 이름으로 계절 한정 메뉴를 내놓았다. 한가위는 무슨 맛인가. 달콤한 곶감, 밤, 호두, 청사과의 미디엄 바디란다. 이내 쫀쫀하게 늘어나는 곶감의 살점이며 찻숟가락 끝에 샛노랗게 굽어지는 찐밤의 알찬 속이 떠오른다. 기억은 감정을 자극하고 감정은 행동을 일으킨다. 


풀문 블렌드. 표면에 오후의 가로수가 비친다. 해당 블렌드의 이미지에 맞추어 커피잔을 내놓는지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보름달이 한가득 담겨 나왔다. 차를 마실 때처럼 수색을 보고 천천히 냄새를 맡아본다. 한 모금 머금어 입에서 굴리자 라이트 혹은 미디엄 로스트에서 주로 발견되는 청량한 신맛이 느껴진다. 이걸 청사과 향이라 불렀구나. 


곧이어 산뜻한 쓴맛이 뒤를 잇는다. 느낄 수 있는 '맛'은 이걸로 끝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통각이 유발하는 매운맛과 같은 감각을 제외하면) 미각은 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이 기본이며 음식의 풍미 대부분이 후각의 소산이다. 


커피를 아직 입에 머금은 상태에서 가볍게 숨을 내쉰다. 이거다! 로스팅에서 오는 탄내가 유난히 달착지근하다. 이 지점을 곶감의 향이라 칭했구나. 숨을 끝까지 내뿜자 단내가 옅어지며 군밤처럼 구수한 향이 코끝에 감돈다. 커피를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한번 더 날숨을 내쉬자 아까의 향이 보다 가늘고 높아지며 아주 희미하게, 마지막으로 볶은 호두 비슷한 내음이 남는다. 


오늘은 운이 좋네. 보물을 다 찾았으니. 


모든 커피가 매번 이처럼 선명한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라이트 로스트는 레몬, 미디엄 로스트는 한 톤 낮은 사과나 살구를 닮은 산미를 품으며, 시티 로스트부터는 쓴맛이 강해짐에 따라 견과류와 흙내가 짙어지지만- 솔직히 이게 왜 체리야, 이건 또 왜 후추야, 전부 기분 탓이야, 뻥은 아니야, 싶을 때가 훨씬 더 많다. 


때문에 하나하나 더욱 정확히 파악하고 싶다. 맛에도 높이와 너비가 있다면 돌돌 풀어 펼쳐 놓고 이 맛은 여기, 저 맛은 저기, 하며 크게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향과 맛을 숨긴 무언가는 근사하다. 보물이 숨겨져 있다던 동네 빈집처럼. 너를 감추고 있는 지평선처럼.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마실거리를 대하게 되었다. 


먼저 색을 본다. 커피는 해당되지 않을 때가 더 많지만, 거의 모든 종류의 차와 와인에 통한다. 특히 홍차의 경우 수색만으로도 기본적인 블렌딩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음으로 냄새를 맡는다. 커피의 경우 대체로 라이트와 다크 정도의 차이 이상을 느끼기 어렵지만, 홍차, 특히 와인의 경우 입에 들어왔을 때의 맛과 풍미를 알려주는 척후 노릇을 할 때가 많다. 


입에 머금어 맛을 본다. 오미가 주는 각각의 세기와 그 비율을 느껴 본다. 입 앞에서 느껴지는 맛과 삼킬 때 느껴지는 맛이 (물론) 다르다. 드물게 입천장이나 혀 뒤에서도 맛이 느껴진다면 당신은 럭키! 인생이 조금 더 즐거워지는 감각을 타고나셨습니다.


그 상태로 가볍게 숨을 내쉬어 본다. 커피나 홍차 라벨에 적혀 있는 향 중 가장 대표적인 향이 이때 느껴진다! 다시 들이쉬면서 달라지는 향을 체감한다.


삼킨 후 조금 지나 다시 숨을 내쉬어 본다. 이때 잔향을 남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매일 카페인 충전할 때마다 이 수순을 밟진 않는다. 매번 각 잡으면 빨리 죽어요. 


왜 성가시게 이런 과정을 밟는가?


혹자는 그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대답은 간단하다. 즐거우니까요. 


세상의 인류를 먹기 위해 사는 사람과 살기 위해 먹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전적으로 후자에 속한다. 딱히 많이 먹지도 않고, 배가 고플 때 먹고, 허기가 가시면 그만둔다. 유명 셰프나 미식가가 등장하는 프로를 볼 때마다 그들이 얼마나 먹는 걸 즐기는지, 맛있는 음식에서 쾌락을 찾는지, 새삼 놀란다. 


내게 먹는 행위가 가장 즐거울 때는, 맛을 느낄 때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맛을 발견하고 이해하며 분류하고 연결지을 때이다. 인간이 파악하는 세상의 모든 정보는 감각기관을 통해 걸러져 나온 질료이며 오감은 주어진 정보에 대한 유기체 나름의 해석이다. 맛과 향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재일작가 서경석은 한때 이야기했다. "뭔가 하나 알게 되면 아주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혹시 만약 추하고 잔혹하고 보기 싫은 것이라도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는 인간으로서의 어떤 쾌락이라 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것 아닌가요? 몰랐는데 자신의 시야를 넓혔다, 이런 것이지요." 


맛과 향은 근사한 앎의 대상이다. 생소한 맛을 아는 일, 숨겨져 있는 향을 찾아내는 일은 내가 모르는 세계의 일부를 아는 일이다. 무언가를 새로이 아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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