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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tensia Sep 21. 2019

끝내주는 저녁식사

브로콜리 꽃순과 돼지고기 등심구이

별거 안 했는데, 평범한 식사가 눈이 반짝 뜨이도록 맛있는 날이 있다. 흡사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집 "먼 북소리"에서 묘사했던, 그리스 완행버스 속에서 다 같이 나눠 먹던 둥근 치즈와 포도주의 현현 같은 느낌이다.


이틀 전 버번에 잰 돼지 등심 한 덩어리를 사다 놓았다. 오늘 저녁에는 먹어야 맛있겠다 싶어 홀푸즈에서 곁들일 야채를 찾았다. 오호, 이번 주는 유기농 브로콜리 꽃순이 묶음당 2달러에 세일을 한단다. 진한맛 야채를 상상하니 입맛이 당겨 싱싱한 놈으로 한 단 집어왔다. 


그제는 차돌박이, 어제는 베이컨을 신나게 굽고 나서 채 씻어놓지 않은 프라이팬에 기름이 흥건했다. 여기에 구우면 풍미가 좋겠는데. 요즘 브런치 파는 동네 식당에서는 오리기름이나 베이컨 기름에 튀긴 프라이도 메뉴에 자랑스레 올라오곤 한다. 센불에 팬을 달구면서 브로콜리를 데칠 물에 소금도 넉넉히 넣어 올렸다. 일 분쯤 지나 중불로 줄인 후 냉장고에서 빼놓은 등심을 척 얹자마자 지글거리기 시작한다. 아직 고기가 좀 차갑긴 하지만, 매번 각 잡으면 빨리 죽는다.


브로콜리는 손가락 한두 마디 길이로 대충 썰어 줄기부터 투하한다. 3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결국 타이머를 한 번 더 돌렸다. 부드러운 꽃순 부위는 보통 3분이면 족하다. 


새파랗게 데친 채소를 보면 가슴이 뛴다. 입맛이 요동을 친다.

브로콜리를 뒤적이며, 일이 분마다 적당히 고기를 뒤집어 준다. 한창 끓는 기름은 소리도 존재감도 요란하다. 프라이팬 위에 덮어두는 망을 따로 사길 잘했다. 마지막 한 줌의 브로콜리 순을 데칠 때쯤 프라이팬의 불을 약불로 낮추어 몇 분을 더 끌었다. 마침내 모든 불을 끄고 끓는 물도 따라 버린 후 팬에서 구워진 고기를 끄집어냈다.


아니, 이건 좀 근사하잖아.


인물이 좋으면 청바지에 티셔츠만 걸쳐도 뭐가 된다더니. 음.

평소엔 건강을 먼저 생각하다 보니 기름에 인색한데, 간만에 놀라운 결과물이다. 고온에 자작하게 익어가면서도 겉면이 타버리지 않고 부엌 불 아래 전에없이 눈부신 메일라드 반응을 완성해냈다. 브로콜리도 아작하게 씹히는 것이, 느낌이 좋다. 버터나이프로 씨겨자를 듬뿍 떠 한 찰싹, 다시 서양 고추냉이 마늘소스를 한 찰싹 얹은 후 바로 식탁으로 가져갔다.  


가늘게 핀 꽃순을 하나 집어 고추냉이 소스를 듬뿍 발라 입에 톡 던져 넣었다. 다 자란 브로콜리보다 부드러우며, 끝대로 갈수록 쇠맛이 강하고, 줄기는 더 달콤하다. 무엇보다 노랗게 필 꽃봉오리를 와작와작 씹어먹는 감촉이 생생해 좋다. 법랑질 치아를 지닌 잡식동물의 행복이다. 십자화과 식물이 대개 그렇듯 브로콜리도 대표적인 진한맛 채소이므로, 곁들이는 소스 역시 랜치라든가 베아르네즈, 하다못해 마요네즈처럼 농밀한 게 좋다. 


고기를 썰어내는 칼 끝이 짙은 갈색으로 바삭거린다. 따로 온도는 재지 않았지만 단면은 먹음직스럽게 윤기 도는 잿빛이다. 서당개 삼 년은 아니더라도 팬-프라이 스테이크라면 실패하지 않는다. 겉에 붙은 두툼한 지방은 베어내고, 한 조각 잘라 씨겨자를 바르고 입에 넣는다. 아미노산과 당류의 대화합이 남기는 쾌락은 인류가 불에 고기를 구워 먹기 시작한 이래 유구히 이어져 왔다. 화식의 승리는 곧 인간승리. 


 평소에도 양념을 싫어해서, 고기엔 보통 바다소금 몇 톨과 워세스터셔 소스만 쳐서 먹는다. 버번에 재었다더니, 염지가 되었는지 다른 게 딱히 필요치 않다.

평소에야 건강을 생각해 얇게 썰어낸 살코기 팩을 집어 들곤 하지만, 구웠을 때는 역시 뼈째 붙은 고기가 월등하게 맛있다. 살코기 새 적당히 끼어 있는 지방이 잇새에서 녹진하게 흐르며 브로콜리 특유의 진하고 매캐한 향에 풍미를 더한다. 맛과, 향과, 감촉이 더불어 뇌세포를 자극한다. 뚝딱 데친 야채에 뚝딱 구워낸 고기인데 이렇게나 맛있다. 이상하게 맛있네. 


형언할 수 없는 만족감으로 창밖을 내다본다. 마침 날씨도 맑아, 멀리 사우스 레이크가 엷은 하늘색으로 빛난다. 호수 표면에 도는 빛이 그날의 하늘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매일 바라보는 사람은 안다. 크레인 위에 비둘기들이 종종 열을 지어 앉아 있다. 


기분 좋게 배가 불러 온다. 줄기 예닐곱 토막과 손바닥만 한 크기의 고기 한 점이 접시에 남았다. 넉넉히 먹어도 음식이 남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인류 역사상 오직 소수에게 일어나던 일이기도 하다. 먹고 싶지 않을 때 억지로 먹지 않아도 된다는 건 어른의 증거다. 접시를 랩으로 싸며 또다시 내일을 기약한다.


어떤 날은 야채가 비리고, 어떤 날은 고기가 바싹 말라 버린다. 어떤 날은 구름이 끼고, 어떤 날은 입맛이 없다. 그게 매일의 식사다. 적당한 허기와 적당한 식감, 적당한 간과 적당한 온도, 이 모든 게 깜짝 놀랄 만큼 잘 맞아 들어가는 날은 어쩌다 한 번씩 드물게 온다. 예고도 없이. 오늘이라는 이름의 평상복을 입은 채. 


그런 순간은 기억하고 싶다. 그러니, 후딱 찍어 후딱 적어 올린다. 갓 데친 채소처럼 별 양념도 없이, 따끈따끈하게. 평범한 순간이 때로 가장 근사하다. 그러니 놓치지 말아요. 맛있게 먹어요. 오늘 저녁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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