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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RYU 호류 Jul 03. 2021

서핑 덕분에 초심을 잘 지켰네

큰일 났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모처럼 또 집을 떠나 살았다. 학교 졸업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번에는 가서 많은 걸 해야겠다는 부담을 갖고 싶지 않았다. 오랜만의 해외 생활이지만 굳이, '이런 데를 가보고 이런 걸 해봐야겠다' 하는 위시리스트를 만들지도 않았다. 이런 거 적어두면, 미션 클리어해야 한다는 부담감만 깊어져서 웬만하면 안 만든다. 그저 북반구와는 다른 남반구의 다른 자연환경, 남반구 내에서도 연중 온화한 날씨와 햇빛, 여유로운 풍경 속에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맘에 드는 것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배우고 느끼고 싶었다.




미리 2주 정도 예약한 숙소에 묵으며, 마음에 드는 거주지를 발견할 때까지 여러 동네의 집을 인스펙션 하러 다녔다. 그리고 임시 숙소 체크아웃 이틀 전인가에 드디어 거주할 곳을 정했다. 체크아웃 일자부터 입주 일자까지 며칠 텀이 생겨서, 이 사이에 골드코스트에 가서 여유롭게 있다 오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숙소를 후다닥 다급하게 알아보는 것인 데다가 연말이라서 다인실 숙소밖에 없었다. 그래도 쾌적해 보이는 곳이 있어서 일단 예약했다.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한참을 가서 도착한 곳은 골드코스트의 남쪽 끝인 'Coolangatta(쿨랑가타)'라는 동네였다. 레인보우 베이를 끼고 있는 해변이 있으며, 퀸즐랜드 주(州)와 뉴사우스웨일즈 주의 경계선이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시간대가 서로 다른 주라서, 주 경계선을 왔다 갔다 넘나들 때마다 휴대폰 화면에 뜨는 시각이 바뀐다)

객실 침대 중 하나를 골라 차지하고 짐을 풀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곳으로 산책하러 나가봤다.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 있었는데, 거기 올라가 내려다본 바다 색깔이 환상적이었다. 이때 WINNER의 'ISLAND'를 듣고 있었는데, 레인보우 베이의 바다색은 여기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그것처럼 청량한 민트 색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Rj4toENrnA




밥을 먹으러 숙소의 공용 주방에 들어왔다. 벽의 알림판에 서핑 강습을 할인해주는 Deal이 붙어있었다.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 서핑을 체험하는 장면을 보면서, 한 번쯤은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잘됐네!

다음 날, 숙소 바로 앞의 바닷가로 가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자세 등의 기초를 맨바닥에서 보드를 깔고 배우고, 곧 입수했다. 처음엔 보드에서 몸을 잘 일으키지도 못하고, 좀 일어나 보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서 얕은 바닥에 엉덩이도 세게 찧고 코에는 물 들어가고 난리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파도에 덤비다 보니 보드 위에 양발을 짚고 손을 떼고 서서히 일어나서 버티기 시작했다. 물에서 계속 움직이니 힘이 점점 빠졌지만, 시도는 계속했다. 어느 순간에는 기합 딱 넣고 다리 세우고 곧게 일어서자고 생각하며 갔더니, 10초 이상을 딱 서서 버티며 끝까지 갔다! 오늘 안에 보드 위에 올라서는 건 기대도 안 했고 그냥 경험만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예상을 뛰어넘은 성과를 달성해서 보람차다.


그나저나, 초반에 물에 빠지면서 찧은 데가 무지 아프다. 엉덩방아를 어떻게 찧은 건지 꼬리뼈 부분이 아프다. 멍든 것 정도보다 더 한 것 같았다. 비록 모래 바닥이지만 물이 얕은 데에서 빠지면서 쿵 박은 거라 그런가. 쿵 박는 순간 '어윽, 이거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그래도 계속 연습은 했다. 그 와중에 서핑 성공까지도 한 게 신기할 따름...!

꼬리뼈 골절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당장 다른 숙소로 이동하면서 기차 타고 내릴 때, 입주하는 집에 갈 때 이 무거운 이민가방과 짐은 어떻게 옮기나 싶었다. 그래도 여차저차 해서 간신히 짐을 끌고 옮겼다. 미리 들고 온 보험이 있으니 현지 병원에라도 가서 X-ray를 찍어볼까 생각도 하고, 아니면 한국에 잠깐 가서 정형외과를 다녀올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식구들과 연락하며, '별 일 아니겠지, 그냥 이참에 무리하지 말고 쉬면서 다녀~'라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자꾸 뭘 하려고 애쓰거나 아등바등하지 않게 되었다.


여기 오면서 처음 결심한 것도, 뭔가를 꼭 해봐야겠다는 강박을 갖지 말고 느긋하게 생활하자는 거였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새로운 곳에 왔으니 많은 걸 하려는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서핑하다가 엉덩방아 찧은 돌발상황이, 오히려 초심을 잃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무리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골드코스트에 온 김에 이것도 해봐야 할 텐데...'라고 부담을 크게 가졌던 스카이다이빙도 덕분에 마음 편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나중에는 혹시 몰라 가운데가 뚫린 방석을 다이소에서 사서(서양에도 다이소가 있다니!) 깔고 앉으며 지냈다. 신기하게도 며칠 지나니, 통증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새로운 거처에 입주하고서도 여기저기 돌아다녀야겠다는 압박감을 버리고, 막 많은 계획을 소화하려 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밥 해 먹고 도서관 가거나 친구 만나고 강변이랑 공원 산책하고, 마트 가서 구경하고 장 봐오고 하는 단순한 일과를 즐겼다. 자꾸 뭔가를 하려고 막 애쓰거나 아등바등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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