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전구 편
10년째 계속 사용하는 브랜드가 하나 있다. 침실과 거실, 심지어 옷방에도 이 브랜드의 제품을 하나씩 두고 있는데, 얼마 전에도 또 하나를 샀다. 바로 백열전구다.
집에서는 좀처럼 형광등을 켜지 않는 나에게 백열전구는 무척 고마운 존재다. 형광등 특유의 밝은 빛이 집에선 왠지 부담스러워서 가능하면 노란빛을 내는 백열전구를 켜 놓곤 한다. 처음에는 조금 어둡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보면 전구가 내뿜는 그 따뜻한 빛과 온기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초나 모닥불 같다고나 할까. 매번 이렇게 가까이 두고 쓰다 보니, 제품을 고르는 데도 신중해졌다. 당연히 필라멘트의 수명이 길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국산으로 사용하려고 한다. 이런 기준으로 고르다 보니 나는 10년을 넘게 전구는 하나의 브랜드만 사용하고 있다. 바로 일광전구다.
일광전구는 컨셉진 51호 ‘낭만’ 편에서 다루었던 브랜드인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백열전구를 만드는 곳이다. 일광전구는 대구 서문 시장에서 전업사를 하던 故김만규 회장이 1962년 창립하여 조명용 백열전구를 만들어 온 회사다. 현재는 故김만규 회장의 아들인 김홍도 대표가 1998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끌고 있다.
일광전구를 만드는 사람들을 직접 만난 건 2017년 10월이었다. 잡지사 팀원으로 합류하고 처음으로 브랜드 기사 취재를 위해 대구까지 원정 갔던 것이 기억난다. 일광전구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일광전구 김홍도 대표를 보면서, 또 그들을 취재하면서 ‘이 브랜드로 기사를 진행하길 정말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까이에서 본 그들에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그 내용을 나눠보고자 한다.
<일광전구가 독보적인 존재가 된 이유>
1. 정체성 : 지켜내고자 하는 의지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을 하는 기업인가?’라는 정체성이에요. 저희가 2013년에 슬로건을 새로 만들었어요. ‘We Make Light.’ 우리가 하는 일이 그냥 전구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일상을 비추고 세상을 밝히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죠.”
1998년 가업을 이어받은 일광전구 김홍도 대표는 당시 대표 이사직에 취임한 이후 매일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운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기업을 새로 일으킬 궁리를 쉬지 않고 한 것이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원형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제품은 백열전구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던 김 대표. 이런 제품이라면 앞으로의 100년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판단해 이 제품을 지키고자 부단히 애썼다.
IMF 외환위기와 2014년부터 정부가 시행한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과 수입 중단에도 그는 강력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그의 팀원들과 함께 일광전구를 지켜냈다. 그것을 가능하게끔 한 원동력은 ‘무엇을 하는 기업인가?’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홍도 대표를 시작으로 전 직원들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리더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따라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모두에게 ‘일광전구를 반드시 지켜낸다’는 ‘신뢰Trust’를 주고, 함께 만들 수 있도록 대화를 통해 ‘상호 몰입Commitment’을 하게 도운 것이다.
마케팅 전문가 신병철의 저서 <논백 리더십 전략>에서도 ‘상호 몰입’은 아주 중요한 요소라 언급된다. 신뢰와 상호 몰입, 이 두 가지가 함께하면 심리학 교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가 말한 대로 ‘플로우Flow’라는 개념이 가능해진다. 서로 몰입하는 수준이 높아지면 애써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계속해서 그 행동을 하도록 흘러간다는 개념이다. 일광전구는 이것을 통해, 모든 직원들이 명확한 하나의 정체성을 확립한 채 흘러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결국 그들은 김홍도 대표가 취임한 지 15년이 지난 2013년에 서로의 생각을 모아 ‘We Make Light’라는 브랜드 슬로건을 만들었다. 이 메시지를 통해 대외적으로도 확고한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시작부터 ‘무엇을 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세우고, 그 의지를 지키기 위해서 모두가 노력한 결과, 그들은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2. 디자인 : 변화하는 감각
일광전구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가정용 백열전구가 많이 사용되던 시기에는 ‘번개표’로 유명한 금호전기, 남영전구 등이 백열전구 사업에서 우선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의 LED(발광 다이오드)전구 확산과 2014년 정부의 ‘가정용 백열전구 생산 및 수입 금지’ 조치가 시행되자 이들은 백열전구 사업을 접었다.
일광전구도 이 시기에 LED로 모든 사업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지, 아니면 사업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2013년, 일광전구는 대대적인 변화를 모색하게 된다. 백열전구의 생산 금지 조치는 가정용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에, 일광전구는 가정용이 아닌 장식용 백열전구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백열전구에 다른 기업들이 하지 않았던 디자인을 입혀 새로운 가치를 더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그들은 더 나아가 필라멘트를 꼬거나 전구의 유리를 각진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만드는 등 파격적인 디자인의 제품도 선보였다. 장식용 백열전구를 생산하기로 했으니, 작정하고 디자인한 것이다.
김홍도 대표는 이런 대대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이유를 ‘나이는 60대이지만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을 모색하고, 그 방법이 효과적인 것이라고 판단되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3. 기본기 : 정리 정돈의 습관화
‘정리 정돈.’
일광 전구를 취재하면서 김홍도 대표가 가장 많이 한 말이다. 그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그리고 누가 찾아도 알 수 있도록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대표실과 직원들이 머무는 공간은 정말 깔끔했다. 슥 돌아봐도 A4용지는 대략 어디쯤 있겠구나, 생각될 정도로.
공장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자재와 전구가 어느 정도는 어지럽게 쌓여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들어간 공장은, 예상과 다르게 라인 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공장을 둘러보면서 ‘정리와 청결이 모든 일의 기본’이라고 했던 김홍도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사고가 나고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했던 그의 말을 들을 때 뜨끔했다. 어떻게 보면 정말 당연하고,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또 가장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아닐까.
'당장 내 책상이나 사무실은 어떠한가? 뭐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는가?'
사실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반성하고, 또 적극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리 정돈. 뭐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안다는 것은 비단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물건을 정리하는 습관은 일에서도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떻게 끝내야 할지 말이다. 그래서 김홍도 대표는 모든 직원들에게 가장 첫 번째로 정리 정돈을 강조한 것이 아닐까?
앞에서 말한 세 가지는 우리 일상에서 바로 적용해볼 만한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무엇을 할 것’이라는 정체성이 있는가? 변화가 두려워 실천을 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가장 기본인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인가에 부딪혀 답답할 때, 나는 일광전구에서 알게 된 이 세 가지를 계속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다 보면 위기 상황에서도 돌파구를 찾았던 일광전구처럼 자연스럽게 새로운 길을 찾곤 했다. 혹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위의 내용들을 간과하고 있었던 분들이 있다면, 꼭 다시 한번 더 김홍도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말들을 곱씹어 보길 바란다.
마케터 호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