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Prologue : 붉은 색을 보는 눈
교수는 새로운 슬라이드로 화면을 넘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흐르며 생명체는 더욱 정교한 시각 기관을 갖게 되었고, 그 사이 우리의 조상 격인 포유류도 등장하게 됩니다.
이게 약 2억 2천5백만 년 전이죠.
최초의 포유류는 ‘브라질로돈 쿼드랑굴라리스(Brasilodon quadrangularis)’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동물이었어요.
땃쥐와 비슷한 모습이었죠.”
그는 칠판 가장자리 한편에 ‘Brasilodon quadrangularis’라는 이름을 써넣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포유류는 아주 약한 존재였고,
주로 포식자들을 피해 어둠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 눈이 밝은 환경보다는 어두운 환경에 적응했죠.
오랜 세월 동안, 이들은 두 가지 색깔밖에 구분하지 못했어요.
대부분 녹색과 갈색 정도였죠.”
학생들은 이제 강의에 깊숙이 빠져 있었다.
질문은 사라지고, 호기심 어린 눈빛만이 남았다.
교수는 그들의 반응을 흘끗 바라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색을 구분하는 능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죠?
불 꺼진 방 안에서 붉은색과 파란색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요.
그래서 어둠에서 가장 먼저 찾아야 하는 건 색이 아니라, 형태와 명암입니다.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얼마나 잘 감지할 수 있는지가 생존의 열쇠였던 겁니다.”
이윽고 그는 칠판 한쪽에 사람 눈의 구조를 간단히 그리기 시작했다.
곡선을 그으며 입체적으로 묘사한 눈 그림은 의외로 섬세했고,
학생들은 숨을 죽인 채 그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우리 눈에는 두 가지 주요한 시각 세포가 있습니다.
바로 원추세포와 간상세포예요.
원추세포는 이름 그대로 원뿔 모양이고, 색을 구분하는 기능을 하죠.
반면 간상세포는 막대기 형태를 하고 있으며, 주로 밝고 어두운 정도를 감지합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분필을 내려놓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포유류는 진화의 초기 단계에서 야간이나 어두운 굴속에서 활동해야 했던 이유로 인해,
간상세포가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세계는 색보다 그림자와 윤곽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셈이죠.”
그 순간 강의실은 마치 수천만 년 전의 어둠 속으로 잠시 이동한 듯, 고요하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약 5,700만~9,000만 년 전에 우리가 영장류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이 나타났습니다.
공룡이 멸종하고 난 뒤죠.
그들은 포식자들을 피해 빽빽이 자라난 열대우림의 나무 위로 터전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낮에 활발하게 생활하지 못했어요."
칠판 앞에서 그는 천천히 한 걸음을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서, 아주 먼 옛날…
포유류에게도 새로운 눈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만 년 전, 네오젠 시대에 접어들면부터였죠.”
교수의 목소리는 한층 더 낮아졌고, 그만큼 더 깊어졌다.
“그 시대의 지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따뜻했고, 대지는 밀림과 숲으로 빼곡히 뒤덮여 있었죠.
그리고 우리의 먼 조상들 즉, 영장류들은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더 높이, 더 멀리 이동했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을 택한 거예요.”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나무 위는 지면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습니다.
두 가지 색깔, 녹색과 갈색만으로는 부족했어요.
잘 익은 열매를 어렴풋이 찾아낼 수 있었지만,
손쉽게 먹이를 찾아내고, 포식자를 피하며,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선 더 섬세한 시각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한 가지 놀라운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는 한 박자 말을 멈추고 칠판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유전적 돌연변이.
그 변화는 우연처럼 찾아왔고, 어떤 존재에겐 세 번째 색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선사했습니다.
바로 빨간색이었죠.”
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빨간색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요?”
궁금증을 억누르지 못한 질문이었다.
교수는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 숲 한가운데서, 잘 익은 과일은 무슨 색일까요?”
“붉은색이요!”
여러 명의 학생이 동시에 외쳤다.
교수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붉은색. 익은 과일은 붉게 물들지요.
이 색을 볼 수 있었던 유인원은 누구보다 빠르게, 정확하게 먹이를 찾을 수 있었죠.
그리고 그것은 생존의 확률을 확연히 높였습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손가락으로 허공을 그리듯 가볍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 시절 존재했던 절반 정도의 식물은
어린잎, 그러니까 더 많은 영양분을 가진 연한 잎사귀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어요.
그것을 구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은 곧 에너지의 우위를 의미했습니다.
또 하나. 포식자인 육식 동물들의 보호색은 일반적인 2 색각 동물들을 피하기 위한 것이어서,
붉은색은 본다는 건 그들의 몸에 가진 줄무늬나 무늬의 미세한 차이와 같은
그 미묘한 시각 정보도 이 능력을 가진 자에겐 남김없이 보였을 거예요.
그것은 생존이자, 번식의 무기였던 겁니다.”
교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웅변이 아닌, 거의 속삭임처럼 강의실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바로 그 조용한 진화, 눈 속의 작은 변화에서 인류의 긴 여정이 시작됩니다.
모두가 2가지 색을 보는 세상에서,
3가지 색은 보는 혁신을 신체 내부에서 만들어 낸 것이죠.”
강의실은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워졌다.
학생들은 마치 그 시대의 나무 위에 서 있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교수는 칠판 앞으로 다시 돌아가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갔다.
『레드(Red)』
백색 분필이 칠판 위를 미끄러지며 완성한 이름은 단순했지만, 그 속엔 힘이 담겨 있었다.
“이제, 그 최초로 세 가지 색을 본 유인원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를 ‘레드’라고 부릅니다.”
교수가 돌아서며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묘한 기쁨과 긴 여운이 담겨 있었다.
학생들의 눈빛은 이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기 직전의 설렘이 서려 있었다.
교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리고 마치 다른 시대로 문을 여는 이야기꾼처럼, 또렷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하세요. 모든 위대한 변화는 아주 작은 발견에서 시작된다는 것.
이제 최초로 붉은색을 본 레드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