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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he Red (1)

1) Prologue : 엘리아스 로완의 역사 강의

by 호서아빠

[Prologue]

Prologue

햇살이 부드럽게 깔린 아침, 강의실은 고요한 성소와도 같았다.

강의실의 벽면은 짙은 밤색 목재로 단정히 마감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둥근 몰딩 틈 사이로 고풍스러운 조명이 은은히 번져 나왔다.

마치 시간의 먼지를 품은 듯한 황금빛이었다.


강의실에는 100여 명의 학생들이 앉아 있었지만, 조그마한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경건한 분위기가 있었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한 중년의 남자가 강단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40대 중반의 남자, 엘리아스 로완(Elias Rowan) 교수였다.

세계적인 역사학자이자, 가장 유명한 스타 교수로,

이번 학기도 그의 수업을 수강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학생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그가 들어서자 몇몇 학생들의 눈이 무심코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로완.’ 고대 켈트 신화 속 지혜의 나무.

누군가는 그 이미지와 그의 실루엣을 겹쳐 보았다.


강의실 문에서 교탁까지 짧은 거리에서도 결코 흔들림 없는 걸음은 묘한 위엄을 풍겼다.

검은 머리카락엔 잿빛이 은은히 섞여 있었고,

자연스럽게 뒤로 넘겨진 머리칼은 가볍게 웨이브가 져 있었다.

광대를 감싸는 단정한 턱수염,


그는 오른손에 하얀 분필을 들고 칠판 앞으로 나아갔다.

잠시 강의실을 둘러보는 눈길은 무언가를 측량하듯 조용했고,

곧 그는 초점 있는 시선으로 칠판에 천천히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온 침묵의 시작처럼,

첫 글자가 칠판 위에 적히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칠판에 단정하게 새겨진 글씨는 큼직했고, 한 획 한 획에 일관된 리듬이 있었다.

수 초간 자신이 쓴 글을 쳐다본 뒤,

엘리아스 로완 교수는 조용히 분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가 돌아서는 순간, 100여 명의 학생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은 각기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묘하게 비슷했다.

역사 강의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석학에 대한 놀람, 기대, 그리고 약간의 불안마저 보였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본다는 것을 물어보는 이유가 궁금했다.

다양한 국적과 언어를 지닌 학생들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두 하나의 질문 앞에 할 말을 잃은 존재처럼 보였다.


교수는 손을 가볍게 모아 책상 위에 올리고,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지금 보는 이 모든 색은 여러분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질 겁니다.

빨강, 초록, 파랑…

하지만 말이죠, 우리가 보는 이 색들은,

우리가 RGB의 세 가지 색을 볼 수 있도록 진화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었을 거예요.”

말끝이 조용히 맺히자, 강의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몇몇 학생들이 조심스레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누군가는 미묘하게 눈썹을 찡그렸고, 누군가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세 가지 색을 보는 것과 역사 강의가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교수는 그런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는 설명을 이어가기보다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처음 지구에 생명이 나타났을 때,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아니, 다르게 물어볼게요. 그 당시 살아가던 동물들에게 세상은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요’?


그때, 앞줄에 앉은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말했다.

“질문이 두 개지만… 같은 의미 아닌가요?

세상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동물들에게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는…”

교수는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은 사실… 성립되지 않는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그 시절의 동물들에겐 ‘눈’이 없었거든요.”


강의실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교수의 말은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

“최초의 동물들은 빛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어둠 속에서 촉각이나 화학적 신호에 의존하며 살아갔죠.

그들에게는 ‘본다’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겁니다.

말 그대로, 세상은 그들 앞에 존재했지만—그들은 그것을 결코 ‘볼 수’ 없었어요.”


그는 말을 멈추고, 책상을 가볍게 한 번 두드렸다.

책상의 나무가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이 짧게 울렸다.


“하지만, 약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라 불리는 시기가 도래하면서 많은 것이 혁명적으로 바뀝니다.

생물 진화사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 중 하나죠.

불과 몇 백만 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지구에는 갑자기 수많은 새로운 생명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을 우리는 ‘캄브리아기 대폭발’이라고 부릅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더욱 조여들었다.

“수많은 생명체들 중, ‘삼엽충’이라는 작고 단단한 생물이 있었습니다.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을 이름이죠?

그들은 최초로 ‘눈’을 갖게 된 존재였어요.

물론 우리가 생각하는 복잡한 눈은 아니었죠.

단순한 광수용기*에 불과했습니다.

광수용기 : 빛을 수용하여, 신경 신호로 전환시키는 것


하지만 그 작은 기관이 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빛’을 인지하게 만든 겁니다.

인류보다 훨씬 오래전, 삼엽충은 어둠 속에 첫 번째 ‘시선’을 띄웠던 존재였죠.”

교수의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흐르는 침묵은 무언가 경건한 기분마저 불러일으켰다.

‘처음으로 무언가를 본 존재.’
그 말이 강의실 공기 속에 잔향처럼 오래 남았다.

교수는 다시 칠판 앞으로 다가가, 천천히 큼직한 글씨로 또 하나의 문장을 적었다.

『최초의 눈』

글씨는 간결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거대했다.


“삼엽충은 인류 이전의 생명체들 가운데, 최초로 눈을 가진 생물 중 하나였습니다.

아주 단순한 구조였지만, 빛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것이죠.

단지 작은 변화 같아 보여도, 이 사건은 지구 생명체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교수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단단했고, 칠판에 남은 글자들과 함께 공기 중에 여운처럼 퍼졌다.

그때, 강의실 뒤편에서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볼 수 있다는 게 인류의 역사에 그렇게 중요한가요, 교수님?

우리에게는 시각뿐만 아니라 오감이 있잖아요.”

질문은 짧았지만, 그 속에는 진심 어린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로완 교수는 잠시 학생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대답을 바로 하지 않고, 눈으로 그들의 눈빛을 읽는 듯, 한 호흡 정도 뜸을 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처음으로 본다’는 건 단순히 감각 하나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곧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혁명이에요.”


잠시 멈춘 그는 강단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눈은 단지 빛을 보는 기관이 아닙니다.

눈을 통해 생명체는 포식자를 피할 수 있었고, 먹이를 찾고, 짝을 골라 번식할 수 있게 되었죠.

그 결과 생태계는 한층 복잡해졌고, 생존 경쟁은 이전보다 훨씬 치열해졌습니다.”


학생들의 펜이 일제히 움직였다.

누군가는 기록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교수는 그 반응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짓 없는 확신이 담긴 말투는 어느새 강의실을 하나의 무대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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