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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서아빠 Jan 31. 2024

연문위키 - 11편. 투자와 투기사이②

2) 네덜란드의 몰락

※ 연문위키는 관지식과 해력 주의 읽기 경험 우기 프로젝트의 준말입니다.


■ 주식회사 개념의 도입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서명 - 최초의 국제법이다.

네덜란드는 스페인(합스부르크가)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무 80년간(1567년 –1648년) 독립 전쟁을 이어나갔어요. 그리고 네덜란드 북부의 저지대 17주가 독립전쟁 초기부터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여 사실상 독립을 했고, 이후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스페인의 식민지 시절부터 유럽의 바닷길을 장악했고, 원양 항해가 가능한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한 네덜란드였기에, 스페인의 몰락 후 자연스레 대항해 시대의 패권을 자연스럽게 이어받을 수 있었어요.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가톨릭교(구교)와 기독교(신교) 간의 30년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1648년에 체결된 평화 조약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 시대가 열리게 되었어요. 네덜란드, 스위스도 이 조약 때문에 독립을 인정받게 되고, 종교의 자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에 오게 되고,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건국의 아버지(필그림 파더스)가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가장 큰 특징은 신성로마제국의 많은 공국들이 로마 황제의 영향력에서부터 벗어나 독립적 주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오늘날 왕이 아닌 국민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주권주의가 출발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인도에서 거래한 후추나 기타 상품들의 마진(margin)은 너무나 달콤했어요. 10척의 선박 중 1척만 돌아와도 105%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 이익에 민감한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겠죠.


하지만, 항해 사업은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산업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왕실'이나 '국가 정부' 이외에 이렇게 큰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상인 계급이 매우 발달한 네덜란드도 마찬가지였죠. 바로 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최초로 도입하게 됩니다.

※ 조달(調達(고를(조), 통달할(달)), Procurement) : 자금이나 물자 따위를 대어 준다라는 의미로 주로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것을 지칭합니다. 군대에 납품하는 것은 '보급'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달청'에서 담당해요.
기업에서도 조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과 서비스에 직접 포함되지 않는 기타 자재들에 대한 구입을 의미합니다.
주식회사(株式會社, corporation)
 주식을 발행하여 자본금을 충당하는 회사를 말합니다. 주식이란 주주의 권리·의무에 관해서 세분화된 증서인데, 이때 주식을 산 주주는 자기가 산 주식의 금액만큼만 출자 의무를 지게 돼요. 회사명 뒤에 co.,ltd., ltd, Inc.라고 표기합니다.

주식회사의 개념은 포르투갈과 영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상용화된 건 네덜란드입니다.


기본적으로 네덜란드는 상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성격이 있었기 때문에, 한 명의 거대 자본가의 투자보다 여러 명의 공동 투자가 더 유리했어요. 또한, 인도까지의 항해는 1~2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하나의 배에 몰빵 집중 투자하기보다 여러 대의 선박에 분산 투자하는 것을 더 선호했을 거예요. 이러한 부분들을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상인들은 오늘날 대부분의 주식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배당금'이라는 개념과 주식을 사고팔 수 있는 '주식 시장'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배당금(配當金(짝지을(배), 마땅히(당)), dividends)
기업이 기업활동을 통해 발생한 이익 중 사업에 재투자하는 부분을 제외한 이익 잉여금의 일부를 주주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말합니다.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출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로고

이렇게 만들어진 주식회사들이 1602년 하나로 통합되어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는데, 그게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약칭 VOC)입니다. 작은 규모의 주식회사로는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네덜란드 의회는 자국 산업의 경쟁력을 위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만든 것이죠. 따라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처음부터 국가의 기능을 상당 부분 인정받아, 해외에서 국가를 대신하여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어요. 17세기 초 출범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군인은 3,000여 명이었는데, 1750년 경에는 17,000여 명으로 확대되었을 정도예요.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 전국의회를 대신하여 아시아의 국가 및 영주들과 조약 체결, 전쟁 선포, 요새와 상관 설치, 군인 징발 등 국가가 할 수 있는 여러 기능들을 대신할 수 있다.


동인도 지역의 식민 지배 국가

지만, 이미 아시아의 대부분은 포르투갈이 차지했거나, 인도의 무굴 제국과 같이 기존의 왕권이 강한 지역들이었어요. 그래서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힘이 약한 동남아시아의 섬들 위주로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지역을 '동인도'라고 불러서 '동인도회사'가 탄생한 것이에요. 1605년 지금의 자카르타 지역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해상 무역에 뛰어들었어요.


사실 VOC가 처음 한 일은 해적이 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타깃은 포르투갈의 상선이었죠. 이때 약탈한 재물로 VOC의 자본금이 50% 증가했다고 해요. 포르투갈이 '무역로 독점'에 과도한 투자로 몰락해가고 있었는데, 네덜란드가 동남아시아의 재해권을 빼앗으면서 그 몰락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과 달리 '시장의 독점'에 주력했어요. 동남아시아 지역은 세계 어디에도 나지 않는 새로운 향신료인 육두구(nutmeg)와 정향(clove)이 나는 곳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무역로를 장악한 네덜란드는 점령지에 향신료 재배를 강요하여 새로운 향신료 시장을 만들었어요. 포르투갈이 유럽과 인도를 잇는 무역로에 집착했다면, 네덜란드는 향신료 재배지를 넓히고, 현지 소비를 더 확장하는 전략을 사용했어요. 실제 아시아 지역의 '시장'을 지배하려고 했던 거죠.


19세기 남미의 설탕 플랜테이션

하지만 인위적인 시장 진입을 성공시 키기 위해서는 '강제로' 공급을 조정해야만 했어요. 점령지의 원주민들은 가격이 떨어지면 (강제로) 다른 농사를 지어야 했고, 가격이 오르면 (강제로) 다시 그 향신료를 재배해야 했어요. 이 과정에서 '폭력'이 동원되었습니다. 이런 강제적 대규모 농장을 플랜테이션(Plantation)이라고 합니다. 이런 점령지 착취를 통해 네덜란드는 17세기 최고의 무역 국가이자 부자 나라가 될 수 있었어요.

플랜테이션(Plantation)
환금 작물(cash crop)을 전문으로 하는 대규모 상업적 농업농장을 의미합니다.
주로 백인들이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규모의 농장을 건설하고, 농작물을 단일 경작에 의하여 재배하는 농업입니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원주민의 노동력에 의하기 때문에 재배지의 면적에 비해 생산성이 그리 높지 않았어요.
※ 착취(搾取(짤(착), 취할(취), Exploitation) : 자원이나 재산, 노동력 등을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고 빼앗아 이용함.




■ 네덜란드의 몰락


올리버 크롬웰 - 영국 대항해시대의 기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경쟁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히, 영국은 청교도 혁명 이후 영국 식민지의 상품은 영국 선박으로만 항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항해법((Navigation Acts)'를 통해 해운업 육성을 빠르게 진행했어요.




※ 골자 : 말이나 일의 요점이나 핵심. 비슷한 말로는 요점, 핵심이 있어요.
항해법((Navigation Acts, 1651 ~ 1673년 제정)
항해법의 핵심은 잉글랜드의 무역을 잉글랜드의 배로 한정시킨 거예요. 따라서 영국의 배가 많이 필요했으니, 전쟁이 발생해도 충분한 배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어요. 대영제국의 발판이 되는 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제1차 영란 전쟁

이러한 항해법은 네덜란드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다가왔어요. 네덜란드는 유럽의 식민지와 유럽 사이에서 중개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기 때문이에요.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1652년 '영란전쟁(Anglo-Dutch Wars)'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와 영국 간의 전쟁이 계속해서 발발했어요. 대부분의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은 승리하였지만, 결국 1784년 영국과 프랑스에 밀려 항복을 선언하고, 2류 해운국으로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영란전쟁(Anglo-Dutch Wars)
제해권(특히 대서양)을 두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잉글랜드 왕국이 맞붙은 전쟁입니다. 1652년부터 1784년까지 4차례 전쟁이 있었어요. 영란전쟁에서 크게 승패가 갈리지 않았으나, 프랑스 루이 14세와의 지상전(3차 영란전쟁)에 패배하면서 결국 대항해 시대의 패권 다툼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3차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영국을 이기고, 미국의 뉴욕(New York)을 점령하기도 하였는데요 이때 뉴욕을 뉴오렌지(New Orange)로 개명하여 1년간 통치하였다고 해요. 이후 뉴욕을 돌려주는 대시 수리남의 식민지를 확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영란전쟁은 해전으로써 원양에서 대형 범선의 함대 간 근대식 해전 개념을 구축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17세기 최대의 전함 - 바사(Vasa)

네덜란드가 해전에서 패배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국내에 수심이 깊은 항구가 없기 때문이었어요. 기술이 발전하면서 함선은 점점 거대화되는데, 네덜란드의 항구는 그런 큰 배를 입항시킬 만한 시설이 부족하다 보니 다른 열강에 비해 해군력에서 열세를 보이게 되었어요. 이 전쟁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국력을 대부분 소진하고, 많은 선박을 잃게 됩니다.


잘 나가던 네덜란드의 몰락을 종합해 보면 함선 경쟁에서 앞서 가던 네덜란드였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함선 건조 기술이 발달하면서 진보된 기술을 받아들일 하드웨어(항구)가 부족했던 것이죠. 튤립 가격의 폭락 때문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자체의 문제도 컸어요. 오늘날 오너 기업과 문경영인 기업 간의 차이와 마찬가지로, 국왕이 투자한 회사와 주주가 투자한 회사 간의 전략도 매우 달랐어요. 국왕의 회사는 조금 더 과감한 투자가 가능한 반면, 주식회사는 안정적이고 리스크를 피하는 것이 더 우선이었죠. 그리고 국가를 대리해 공권력을 발휘해야 하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중상주의(mercantilism)'를 추구하는 강대국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것도 당연했어요. 체급이 달랐으니까요.

오너 기업과 전문경영인 체제의 기업 간의 차이
- 오너 기업은 그 기업을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경영에 직접 참여하는 체제
- 전문경영인 체제는 그 사업 분야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경영하는 체제

전문 경영인 체제는 전문가가 경영을 하므로, 기업의 실적 향상을 기대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계속해서 성과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투자보다, 단기적 실적에 주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경영 실패 = 해고이기 때문에 리스크를 피하고, 안정적인 경영을 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반대로 오너 경영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장을 선점하거나,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꾸준히 사업을 진행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실력이 아닌 핏줄을 기반으로 경영인이 되기 때문에 기업을 이끌 역량이 부족한 이가 경영권을 잡게 될 수도 있죠. 또한 독단적인 경영이 가능해 경영권을 오·남용할 수 있고, 기업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에 사익 추구 행위로 기업의 성장을 방해할 수도 있어요.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
국가의 부는 생산 과정이 아니라 무역을 중심으로 한 상업에서 창출된다고 본 경제사상입니다. 15세기 중엽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정부 주도 하에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억제하는 강력한 보호 무역 주의예요.
식민지 개척을 확대하고, 보호 무역 정책을 통해 나만 잘살면 돼 정책을 실시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후 아담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 1736년)을 통해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하고, 경제활동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이 나오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손'도 이때 등장하죠.


인도 면목 - 캘리코

그리고, 이 시기 후추는 다양한 곳에서 재배되면서 그 가치가 떨어져 후추 거래의 수익이 예전만큼 못했어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선단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네덜란드 선단들이 후추를 끊임없이 유럽에 공급했기 때문에 후추는 일반 시민들도 이용할 만큼 대중화되었어요.  그 당시 떠오르는 사치품인 면목(캘리코, calico)은 영국이 무역권을 장악한 인도가 원산지여서 후추를 대체할 상품도 찾지 못했던 것도 한 몫했을 거예요.


그렇게 네덜란드의 최전성기는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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