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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서아빠 Feb 05. 2024

연문위키 - 11편. 투자와 투기사이④

4) 번외 - 베네룩스(Benelux)의 탄생

※ 연문위키는 관지식과 해력 주의 읽기 경험 우기 프로젝트의 준말입니다.


■ 모든 것을 프랑스혁명 이전으로...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16세기까지 합스부르크가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어요. 대항해 시대 초반, 아직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세를 떨치던 그 시기입니다.


지속적으로 독립을 갈망했던 북 네덜란드 지역은 17세기 초 80년 전쟁을 통해 실질적인 독립을 이루어 낼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당대 최고의 상업주의 국가인 네덜란드 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공식적으로도 네덜란드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도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어요. 하지만 이때 남부 지역은 독립하지 못하고 스페인의 지배를 계속 받았는데 이 지역이 오늘날 벨기에와 룩셈부르크가 되었어요.


1795년 네덜란드 공화국(북부)과 벨기에(남부)는 모두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의 속국이 되면서 다시 합쳐졌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1814년 프로이센(Prussia)과 러시아(Russia)의 반격에 무릎을 꿇게 되죠. 그리고 지긋지긋한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됩니다.


파티만 계속하는 빈 회의를 풍자한 그림

나폴레옹에 대항해 승리를 거머쥔  오스트리아와 연합국은 모든 것을 프랑스혁명 이전 상태로 되돌리고자 했요. 그래서 1814년 개최된 빈 회의 결과,  오라녀 나사우 가문((House of Oranje-Nassau)의 '연합 네덜란드 주권 공국'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을 연합 통치하도록 했어요. 또한, 네덜란드 국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하도록 결정했죠. 왕국을 부활시켜 혁명의 잔재가 남아있는 프랑스를 억제하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완충 지역을 만들기 위해서였어요.

빈 회의(the Congress of Vienna, 1814 ~ 1815)
빈 회의는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의 주도하에 영국, 프로이센, 러시아 등이 모여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유배 보낸 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입니다. 각국의 이익만을 주장하고, 파티만 계속하다가 의정서를 확정하지 못했는데,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국가들이 단합하여 1815년 6월 9일 '빈 의정서'를 체결하였습니다.

빈 의정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프랑스혁명으로 몰락한 부르봉 왕가(Maison de Bourbon)를 프랑스와 스페인에 복귀시켜 왕정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참고로 현재 스페인의 국왕도 부르봉 왕가입니다.

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빈 체제는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정치의 큰 틀이 됩니다.
※ 완충(緩衝(느슨할(완), 찌를(충)), buffering) : 대립하는 것 사이에서 불화나 충돌을 억제 또는 완화하는 일




■ 벨기에의 독립

1830년 오페라의 밤에 시작된 벨기에 독립운동을 묘사한 그림

하지만 북부(네덜란드) 지역 남부(벨기에) 지역은 너무 달랐어요. 북부는 남부보다 인구도 적었고, 북부는 신교(개신교)이지만, 스페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은 남부는 구교(가톨릭)이었지요. 게다가 북부는 비교적 산업혁명이 일찍 시작되어 공업화가 진전되었고, 남부는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습니다. 언어도 남부 지역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었지요. 게다가 권력을 가진 네덜란드 왕국은 남부 지역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벨기에 독립 운동은 1823년 네덜란드 왕국의 국왕 빌럼 1세(Willem Ⅰ)가 네덜란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에서 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어요. 남부 지역 사람들의 불만이 최고로 고조된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Charles X) 쫓겨나 사건이 일어났어요. 이 혁명의 바람이 네덜란드에도 불었습니다. 1830년 8월 브뤼셀(Brussels)의 모네 극장(La Theatre Royal de la Monnaie)에는 스페인 지배를 받던 나폴리 시민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내용의 오페라 ‘포르티치의 벙어리 처녀’(La muette de Portici)가 공연되었지요.


이 공연이 진행되던 도중에 오페라를 관람하던 시민들 중 시위대가 궐기했고, 다른 일반 오페라 관람객들 시위대에 합류했습니다. 브뤼셀의 시민들도 이에 합류했고, 도로에서 투쟁을 했어요. 이를 진압하려는 네덜란드 왕국과의 시가지 전투에서 남부 독립군이 결국, 승리했고, 1830년 10월 4일 벨기에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독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시위(示威(저잣거리(시), 위엄(위)), demonstration)
: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일정한 공동의 목적을 관철하고자 공동의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 비슷한 말로 궐기(蹶起(일어설(궐), 일어날(기)), uprising)가 있습니다.

시위를 위해 일정한 장소에 모이는 행위를 집회(集會)라고 합니다. 영어 demonstration을 줄여 '데모'라고도 부릅니다.

시위와 비슷한 말로 농성(籠城)이 있는데, 농성은 어떤 자리를 점거하고 일정 기간 동안, 혹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떠나지 않는 항의 행동을 말합니다. 전쟁에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해요.




■ 룩셈부르크의 분리


톨비악 전투 - 클로비스 1세 상상화

벨기에보다 더 남부에 있던 룩셈부르크는 어떻게 네덜란드 왕국에서 독립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살리카법(Salic law) 때문입니다. 6세기 초에 제정된 살리카법은 '여성은 어떤 토지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어마 무시한 법이었어요. 이 법이 유명한 이유는 이 법을 제정한 사람이 프랑크 왕국(Kingdom of the Franks)의 왕 클로비스 1세(Clovis,1 481-511)였기 때문입니다. 프랑크 왕국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의 왕실 족보에 연관이 있는 조상이어서, 혈통과 명분을 중시하는 유럽의 왕가들은 속으로 찝찝한 느낌이었을 거예요.

프랑크 왕국(Kingdom of the Franks)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세운 나라입니다. 중세 초에 서유럽과 중부유럽을 거의 통일했던 나라이자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는 국가예요. 서로마 제국의 임페리움을 계승했음을 서방 세계에서 인정받아 신성 로마 제국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후대 여러 유럽 왕위에 영향을 끼친 살리카법이라는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어요.


나는 프랑스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는 프랑크 민족에 의해 프랑스의 왕으로 선택된 클로비스야말로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나 딸에게 토지를 물려주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대부분의 가정에서 우회로를 통해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했을 거예요. 그렇게 살리카법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 갔어요. 그런 법이 있었다더라 정도로 아는 사람만 아는, 유명무실법으로 800년이 흘렀어요. 그리고 사이에 프랑크 왕국은 다양한 왕국과 공국으로 쪼개졌습니다.

※ 우회로(迂廻路(멀(우), 돌아갈(회), 길(로)), bypass) : 곧바로 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가는 길. 일상생활에서는 길이나 방법이 어떤 장애물로 막혔을 때 다른 방법이나 간접적으로 달성하려는 길을 말하기도 합니다. 반대말로는 지름길이 있어요.
※ 유명무실(有名無實) : 이름은 있는데 실상이 없다는 뜻. 유명하지만 실질적인 가치가 없을 때 사용해요.


1316년 프랑스. 당시 국왕인 루이 10세가 어린 딸만 두고 사망하자, 그의 동생인 필립이 섭정을 맡았어요. 그리고 필립은 왕권을 남자만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어요. 바로 이 살리카 법을 근거로 말이에요. 아마도 파리 대도서관 구석에 먼지가 잔뜩 쌓였을 그 법전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쳤겠지요. 그리고 실제 왕위에 올라 필립 5세가 됩니다.

※ 섭정(攝政, Regent) : 왕이 아프거나, 나이가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에 군주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행위, 혹은 그러한 역할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있는데 이는 "발을 내리고 정치를 듣는다"라는 의미로, 왕의 어머니(황태후)나 할머니(태황태후)가 어린 왕을 대신해 정사를 돌봤는데, 황태후가 신하를 접견할 때 신하가 황태후를 제대로 볼 수 없도록 발을 늘인 데서 유래합니다. 선대 왕의 부인으로서 함께 국가를 운영한 경험을 인정받아 어린 왕의 정치를 돕는 것이 섭정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유레카(Eureka)
"나는 (그것)을 찾았었다"는 의미의 그리스어로 뜻밖의 발견을 했을 때 외치는 단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이 순금으로 만들어졌는지 조사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아 고민하고 있었어요. 하루는 목욕을 하려고 욕조에 들어갔는데, 욕조의 물이 넘친 것을 보고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해요. 왕관을 물에 넣은 뒤, 넘치는 물의 양을 확인해 왕관이 진짜인지 알 수 있었거든요.


마리아 테레지아 - 오스트리아의 국모이자 계몽군주.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여성이 상속받고, 통치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는 데 있었어요. 유럽은 이미 기독교의 영향으로 일부일처제가 자리 잡아, 서자 계승이 불가능하여 딸의 계승권을 인정해 왔거든요. 하지만 살리카법이 인정받는 상황에서 왕이 아들 없이 딸만 있는 상황에서 서거한다면, 다른 나라에서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게 되죠. 유럽의 왕실은 다 혈연으로 이어져 있으니까요. 그리고 곧 이러한 우려는 현실이 됩니다.

※ 서자(庶子(여러(서)), bastard) : 정실 부인이 아닌 첩 여성의 아들을 말합니다. 첩이 낳은 딸은 '서녀(庶女)'라고 합니다. 비슷한 말로 사생아라고도 해요.

HBO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주인공으로 나오는 존 스노우(Jon Snow)도 서자지요. 북부 지역에서는 서자들의 성을 스노우(snow)라고 했다고 합니다.

반댓말은 정실부인 소생의 자녀인 '적자(嫡子)', '적녀(嫡女)'라고 합니다.



14세기 초 섭정인 필립이 다시 꺼내든 살리카법은 20세기까지 그 영향을 미쳤어요.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인 영국과 프랑스 간의 '백년전쟁(the Hundred Years' War, 14~15세기)'도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의 원인이 된 살리카법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18세기 유럽 전체의 전쟁이 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왕위 계승 전쟁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가 합스부르크 왕가를 계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구실을 살리카법에 찾았어요.

백년전쟁의 배경
프랑스 샤를 4세의 여동생 이사벨라는 영국의 에드워드 2세에 시집을 갔어요. 그리고 1326년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드워드 3세)에 올리는 반란을 성공합니다. 하지만 샤를 4세가 1328년 아들 없이 사망하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사벨라는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자신의 아들인 에드워드 3세에게 있다고 주장했어요. 이사벨라 자신은 살리카법 때문에 직접 왕위를 요구할 수 없었거든요. 프랑스는 샤를 4세의 방계인 발루아가에 왕위를 계승하였고, 이사벨라도 어쩔 수 없이 이를 용인했습니다.

그런데 발루아가의 초대 왕 필리프 6세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사이의 전쟁에 개입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틀어졌어요. 그 후 에드워드 3세는 다시 프랑스 왕위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무려 116년간이나 벌어질 전쟁말이에요.


빌헬미나 여왕

다시 룩셈부르크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1815년 빈 회의 이후 네덜란드 왕이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했어요. 하지만 1890년 네덜란드에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이 즉위하면서, 룩셈부르크는 살리카 법에 따라 방계인 나사우-바일부르크(Nassau-Weilburg) 가문아돌프(Adolphe) 대공에게 상속되어 네덜란드의 지배에서 벗어나 분리될 수 있었어요. 지금도 나사우-바일르크 가문이 룩셈부르크의 통치 왕가입니다.

빌헬미나 여왕
즉위 이래 58년 가까이 재위해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집권한 군주입니다. 또한, 2차 대전 때는 독일 국방군에 쫓겨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지만 그곳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며 나치 독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저항의 어머니', '네덜란드의 국모'로 존경받고 있어요. 이 망명기간 동안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관세동맹을 맺고, 베네룩스(Benelux)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 베네룩스(Benelux)와 유럽연합의 탄생


베네룩스 -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베네룩스 3국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베네룩스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세 나라 지역을 통틀어 부르는 말입니다. 세계 2차 대전 말인 1944년 세 나라의 정부는 독일의 히틀러를 피해 영국에 망명 중이었어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라의 설움이란...


이때 세 나라는 서로 관세동맹을 맺으면서 베네룩스라는 말을 처음 만들게 되었어요. 이후 이 관세동맹이  베네룩스 경제 연합(Benelux Economic Union)으로 발전하여 1960년에는 나라의 영토 내에서 노동, 자본, 서비스, 상품 등의 자유로운 왕래를 보장받게 됩니다.

※ 망명(亡命(망할(망), 목숨(명)), asylum/exile) : 자기 나라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받고 있거나, 그럴 위험이 있는 사람이 이를 피하려고 외국으로 몸을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비슷한 말로 난민이 있는데 난민(refugee)은 [인종, 종교, 국적, 사회적 소수자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나 심한 차별을 받을 때 이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하여 보호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관세동맹(Custom union)
 경제 통합 과정의 일부로써, 두 나라 이상이 서로 간의 관세를 없애거나 줄이는 정책 또는 동맹이 아닌 외국에 대한 관세를 공통으로 설정하는 제도입니다. 대부분 공통된 대외 무역 정책을 수립하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경제 통합은 자유 무역 협정(Free trade agreement) - 관세 동맹 - 공동 시장(Common market) - 완전 경제 통합(Economic union) 순으로 진행됩니다.


베네룩스 3국의 관세동맹은 유럽 연합(European Union, EU) 설립의 시발점이 되었어요. 베네룩스 세 나라는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와 함께 유럽 연합의 창립을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유럽 연합의 기초가 되는 조약인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 공동체 가입국이 서명했기 때무네, 1993년 11월 1일부터 발효될 수 있었어요. 이 조약으로 인해 유로(Euro)화 도입, 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 처리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 오늘날의 EU가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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