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의 망설임 끝에

3화

by 전석표

“설화씨, 어디쯤이야? 잘 오고 있어?”


집에서 지수는 설화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의조는 옆에서 과자 봉지를 뜯으며 안 듣는 척 엿들었다.


“응? 길을 잘 못 찾겠어? 길찾기 봐도 그래? 주변에 보이는 건물은? 여운 상가? 아 들어본 거 같은데 가물가물한 게… 어디더라?”


미간이 좁혀진 지수의 그 말에, 의조는 눈이 번쩍 떠졌다.


“나, 나!”


입 모양으로 나 간다를 외치며 팔을 휘적였다. 지수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굴리더니, 통화 중인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설화야, 그러면 거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을래? 아, 송의조가 너 어딨는지 알 것 같다고 데리러 갈 수 있다고 하네. 둘이서 같이 오는 게 낫겠다 싶어서.”


옆에서 의조는 한 건 했다는 얼굴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후, 핸드폰 너머 설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괜찮을까? 괜히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지….”

“아이! 송의조 이미 운동화 신고 있네. 좀만 기다려.”

“그래? 응… 그럼, 잠깐만 기다리고 있을게.”


통화가 마무리되자 지수는 웬일로 대견하다는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상황이 너를 돕는다, 진짜. 얼른 가!”


지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조는 이미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불의 속도로! 불의 속도— 윽, 문 닫힌다 잠깐!”


뛰어내려가는 뒤통수만 보이며, 의조는 골목으로 사라졌다.

숨이 턱에 찰 만큼 달려 도착하니, 건너편 상가 앞에 설화가 서 있었다.

신호등에 선 소년은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띠리링, 잠깐의 신호음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그 짧은 한마디에 심장이 쿵, 하고 튀었다. 의조는 들키지 않으려 애써 담담하게 말했다.


“설화야, 나 지금 건너편에 있어. 보여?”


의조의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설화의 모습이 보였다. 허둥지둥하는 그 모습이 귀여워 버티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이윽고, 소년을 찾은 설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 찾았다! 그리로 갈게.”

“응.”


통화를 마무리하고 설화가 신호등 앞에 섰다. 건널목 반대편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소녀를 바라보면서, 의조는 손을 올릴까 말까 망설였다. 손끝만 허공을 맴돌았다.


‘…해. 하자. 이번엔 해야 해.’


숨을 고르고, 조금 어색하고, 조금 서툰 손 인사가 올라갔다.


“안녕.”


그 단순한 한 마디가, 의조에겐 천 번의 결심이었다.

소년의 어설픈 손 인사를 보면서, 설화도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안녕.”


이어서 신호가 바뀌었고, 설화는 서둘러 건널목을 건너왔다.소년의 앞에 선 소녀는 소년을 올려다보며 미안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미안해… 나 진짜 방향 감각이 없어서. 괜히 너만 번거롭게 한 거 같네.”

“아니야 괜찮아! 힘들지도 않았는데 뭘. 어두워서 길도 위험했을 텐데 오히려 낫지, 천천히 가자.”

“…그렇게 말해주니까, 마음이 좀 놓인다. 고마워.”


의조의 옆으로 설화가 함께 걸었다. 단둘이서 걷자, 소년의 심장박동은 의식될 정도로 크게 떨렸다. 그동안은 지수와 같이 세 명이 걸었지, 이렇게 둘만 나란히 걷는 건 오늘이 돼서야 처음이었다.

소년은 괜히 자신의 큰 보폭 때문에 소녀가 힘들진 않을까 혼자 신경 쓰며, 설화의 느릿한 발걸음에 맞추어 걸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발걸음조차도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그저 옆에서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저녁 길을 둘이서 함께 걷는 것만으로 이미 의조는 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걷다가 조심스럽게 힐끔, 설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긴 흑발, 단정한 앞머리, 눈썹 아래로 떨어지는 청순한 곡선. 눈은 동그랗고, 코는 오똑하고, 웃을 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그 표정.

너무―


“예쁘다….”

“응? 뭐가?”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아, 아! 아니! 그… 하늘이! 밤하늘! 밤하늘 예쁘네! 별! 별도 많고…”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게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오자 엄청나게 당황한 의조는 식은땀을 흘리며 둘러댔다.


“그러네… 의조 네가 말해줘서 나도 보게 됐어. 예쁘다.”


그러나 의조와는 다르게, 설화는 딱히 이상한 걸 느끼진 않은 듯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소년의 말에 맞장구만을 쳤다, 소녀의 눈치가 둔한 것에,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걷다 보니 어느새 지수의 집에 가까워졌다. 딱 마침 그때, 소년의 핸드폰에 벨소리가 울렸다.


[수없이 어긋난대도 기다릴게― 아무리 가슴―]


“예.”


전화를 받아 드니, 지체없이 지수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혹시 길에서 쓰러진 거 아니니? 내가 구조하러 갈까 했는데.”

“지금 너네 집 앞까지 왔어.”

“오케이! 그럼 빨리 들어오시죠. 여기 명예 손님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나 지금 담요 두르고 따뜻하게 대기 중임.”

“알겠어.”


짧은 통화를 끊자마자, 옆에서 설화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지수를 너무 기다리게 했나 봐, 얼른 가야겠다!”

“괜찮아 어차피 집 앞인데. 얘 원래 이러니까 이해해.”


3층까지 올라온 발걸음 소리만 듣고도 둘인 걸 알았는지 이미 지수의 집 문은 열려있었다. 지수는 설화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벌렸다.


“넌 겁도 없이 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

“설화야! 모질이랑 같이 오느라 힘들었지? 미안해!”

“뭐? 뭐가 모자라 내가!”

“아니야. 의조 덕분에 금방 왔어. 지수야, 너무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아냐 아냐, 얼른 들어와!”


테이블엔 치킨과 음료수가 올려져 있었고 텔레비전에는 보기로 했던 하이틴 로맨스 영화가 나왔다.

말없이 보는 의조와 설화와는 다르게, 지수는 영화 속 남주인공에게 흠뻑 빠진 얼굴이 되어 턱을 괸 채 꽃받침을 한 자세로 말했다.


“아… 내 주변에는 저런 남자애 없나.”


지수의 말에, 의조는 턱을 어루만지더니 어째선지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저 남자애보다 못나진 않았다고 보는데? 보니까 키는 내가 더 크고, 얼굴은 뭐… 그래도 저 사람이 배우인데, 일반인한테 밀리면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내가 양보 좀 해서 무승부로 해.”


그 말에 지수는 순식간에 싸늘해진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사람이 입을 열 땐, 침묵보다 나은 말이 나와야 한다고 하던데?”

“나 머리만 짧아서 그렇지. 이 정도 얼굴이면 꽤….”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 싶어, 지수는 소년의 말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 그냥 군대나 빨리 가세요. 시험 결과 언제 나오는데? 합격하는 대로 바로 가, 제발.”

“아직 체력 검정이랑, 면접까지 남았지.”

“안 궁금해 닥쳐.”


그새 또 티격태격하는 둘을, 설화는 잠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대로 음료수를 조용히 홀짝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