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다시 영화에 집중하다가, 지수는 의조의 옆에 앉은 설화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설화야! 너는 로맨스 좋아하는 편이야? 어때?”
그런 물음에, 설화는 왜인지 머뭇대다가 대답했다.
“어? 나는… 응. 좋아해. 로맨스.”
소녀의 대답에, 지수는 손뼉을 짝 치며 뒤이어 물었다.
“오, 나랑 취향이 맞는구먼? 그럼 지금 보고 있는 영화는 어때? 재밌지? 아, 저 둘이 꼭 이뤄져야 하는데! 설화 넌 어떻게 생각해?”
설화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음… 나는 그런 거 좋아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계속 마음을 두는 사랑.”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지수는 조금 놀라 눈이 커졌다.
“헉, 설화 취향이 꽤… 있다?”
장난스럽게 놀리는 말투에, 설화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운데에 앉은 의조는 그저 그러는 둥 마는 둥, 치킨 한 조각을 습관적으로 뜯으며 영화에 집중해보려 애썼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영화는 마지막에 접어들었고, 셋 다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윽고 영화가 엔딩 크레딧을 띄우는 그 순간.
“아악! 너무 좋아, 이루어졌어! 어떡해! 저런 고백을 받으면, 어느 여자애가 안 받아주겠냐고….”
지수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며 소파에 몸을 뒤로 던졌다. 혼자 난리를 치는 지수와는 달리, 의조는 조금 무심하게 눈길만 화면에서 떼어 벽시계로 보냈다. 그리고 시침을 확인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뭐야? 열시 반이 넘었네? 영화 시간이 원래 이렇게 길었어?”
놀란 소년의 말에 두 소녀도 동시에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아! 내일 또 학교 간다. 진짜 싫어.”
그러자, 지수만이 찡찡대며 투덜거렸다. 셋이서 자리를 정리하고 난 뒤에, 현관에서 지수는 둘을 보내며 말했다.
“조심해서 가! 송의조, 넌 내일 집 앞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어.”
“그런 말 할 거면 좀 일찍 나와, 제발!”
이번에도 소년의 간곡한 호소는 가볍게 무시하며, 지수는 설화에게만 상냥한 얼굴로 인사했다.
“설화야, 내일 보자, 오늘 즐거웠어!”
“응. 내일 보자, 지수야. 오늘… 나도 진짜 즐거웠어.”
그렇게 둘은 지수와 인사를 나누고 빌라를 빠져나왔다.
나란히 걷는 골목길, 거기서 의조는 눈치를 보며 머뭇대다, 이윽고 소녀에게 물었다.
“저기, 설화야.”
“응? 왜?”
“여기서 집 가는 길은 잘 알아?”
소년이 묻자 설화는 잠시 골목을 둘러보다 입을 열었다.
“아까 왔던 길로… 그냥 다시 가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
그 말에 의조는 일부러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오? 길을 벌써 다 외웠어?”
그러자, 설화는 결국 작은 웃음과 함께 고백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근데 뭐… 정류장 보이면 버스 타면 되니까. 괜찮아.”
그 말에, 소년의 마음 어딘가에서 살짝 문이 열렸다. 지금이다. 놓치지 말자.
“그러지 말고, 바래다줄 테니 같이 갈래? 내가 이 동네 길을 잘 알아.”
의조의 제안에 설화는 고개를 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아까도 나 찾아오느라 힘들었잖아. 또 신세 지기엔 너무 미안해서.”
“괜찮으니까 가자. 내일도 학교 가야 하는데 몇십 분 동안 길 헤매면, 피곤해서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걸.”
“흐음….”
소년의 설득에, 소녀는 자리에서 고민하다가, 곧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럼, 같이 가자. 그리고… 고마워. 정말.”
쑥스럽게 웃는 소녀를 보았다. 웃지 말자고 했는데, 결국 소년의 입꼬리도 천천히 올라갔다.
거리로 나온 뒤엔 잠시 말없이 길을 걷다가, 어색함이 둘을 감싸려 할 때쯤 의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영화 본 건 어땠어? 나는 볼 만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지수가 재밌게 본 거 같아서 괜찮았어! 지수가 영화 속 남자애한테 완전히 빠진 거 같더라?”
설화는 영화에 빠진 지수의 표정을 따라 해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던 소년의 입가엔 몰래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소년이 대화의 물꼬를 자연스레 터서인지, 이번에는 설화가 말을 이었다.
“아까 지수랑 얘기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꿈이 직업군인이야?”
그런 물음에, 소년은 괜히 쑥스러운 듯이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응? 아, 응, 맞아. 아버지가 공군 주임원사시다 보니까, 나도 관심 생기다 보니 따라가게 됐어.”
의조의 말에, 소녀는 걸음을 늦추더니 슬며시 소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서 다시 입을 뗐다.
“…멋있다. 뭔가, 너한테 잘 어울려.”
소녀의 부드러운 감탄에, 그 순간 소년의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길을 걷는 동안에 숨소리마저 신경 쓰일 만큼, 의조의 온 신경은 온통 소녀에게로 쏠렸다. 머릿속에선 수많은 생각이 맴돌았다.
‘무슨 말을 꺼내면 좋지? 아, 할 말이 왜 이리 안 떠올라?’
하고 싶은 말은 끝도 없이 많았는데, 바람처럼 흩어져 잡히지 않았다. 입술만 조금 열렸다가 닫혔다. 그러는 동안, 의외로 먼저 정적을 깨트린 건 설화였다.
“의조야.”
“어! 어?”
설화가 나지막이 사내를 올려다보며 입을 뗐다.
“지수랑은 언제부터 친구였다고 했지?”
물음에, 소년은 눈을 급하게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아, 김지수랑? 어, 걔랑은 유치원 때부터 계속 친구였어.”
“그렇구나… 그래서 둘이 그렇게 자연스러운 거구나.”
“뭐… 싫어도 붙어 다녀야 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
“낮에 카페에서도… 둘을 보면서 생각했어. 친하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고.”
“그, 그래?”
그리고 아주 작은, 그러나 또렷한 한숨 같은 말.
“부럽더라.”
소년은 순간 대답을 잊었다. 가벼운 말이어도, 그 말은 쉽게 흘러가지 않았다.
내가 김지수랑 친한 게 왜 부러운 일이지? 소년의 머릿속으로 많은 물음표가 띄어졌다. 하지만 굳이 티 내진 않으며, 다시 잔잔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지수랑 너랑 그런 장난도 치는구나, 하고… 좀 부러웠어.”
“아… 그래? 너, 너는? 김지수랑은 언제부터 친해졌어?”
“나는 고1 때, 이 학교로 전학 오고 나서 알게 됐어. 처음에 적응을 못 했어서 많이 힘들어했는데, 먼저 말 걸어주고 다가와 준 게 지수였어.”
“그랬구나, 김지수가 그랬었구나….”
속으로 소년은 아쉬움에 한탄했다. 아, 나도 그때부터 친해졌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