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응. 그래서… 나한테 지수는 정말 소중한 애야.”
“그래, 계속 잘 지내봐. 왈가닥이긴 한데, 그래도 자기 친구라면 잘 챙기긴 하더라.”
“앞으로도… 계속 잘 지내고 싶어.”
그런 말을 하는 설화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물들었다.
지수 얘기 덕분인지 두 사람의 입가엔 어색함이 달아났고, 곧 서로를 향해 자연스럽게 물음을 건넸다.
“스무 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야? 대부분 애들은, 가장 먼저 술 마시고 싶어 하던데.”
의조의 말에, 설화는 입을 꾹 다물며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음… 난 딱히 새로운 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지금 같이 있는 사람들이랑, 계속 잘 지내고 싶어.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
“사실은 그게 가장 중요하지.”
얘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신호등 앞이었다. 기다릴 필요가 없이 바로 신호등의 불빛이 바뀌었고, 둘은 그렇게 건널목을 건넜다.
좀 더 걸으니 설화에게서 익숙한 동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놓인 소녀가 소년에게 말했다.
“여기부터는 우리 동네야. 쭉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우리 집이야. 많이 걸었지? 미안해.”
“아니야, 이런 밤길 혼자서 걸으면 위험할 텐데.”
미안해하는 소녀에게, 소년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더 같이 있을 수 있어서 기쁜 의조였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소녀의 눈매에 잠깐 스친 밝음은, 소년에겐 어쩐지 오래 기억될 것만 같았다. 마치 마음속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는 것처럼.
그렇게 소녀의 작은 보폭에 맞춰 걸어가고 있다가, 소녀가 소년에게 넌지시 물었다.
“있잖아.”
“으응.”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좋아하는… 어? 조,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의조의 심장이 순간 위에서 아래로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화가 나한테 이런 걸 물을 줄이야. 불이 붙은 듯 열이 오르는 느낌이 얼굴을 뜨겁게 했다.
소년은, 진정할 틈 없이 뛰는 심장을 가까스로 다스리고서 소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 나는… 어 그래! 너 먼저 말하면, 설화 너 먼저 말하면, 나도 대답할게.”
“그렇게 하는 거야? 음. 내가 먼저 말하면, 너도… 정말 말해줄 거지?”
“설화 너 먼저 말하면! 나도 말할게.”
설화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가, 소리보다 숨이 먼저 새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어. 그럼… 잠깐만. 생각 좀 하고.”
소년의 발걸음과 소녀의 발걸음이 동시에 아주 조금 느려졌다.
설화가 만약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떡해야 하지? 소년의 심장은 쉴 틈 없이 크게 뛰었다. 잠깐 사이에 입이 바짝 마를 만큼, 소녀의 대답만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나는 있어. 좋아하는 사람.”
"어? 뭐, 뭐라고?"
설화의 답에 긴장된 얼굴로 답을 기다리던 사내의 눈은 지진이 난 것처럼 요동쳤다.
“그… 누, 누군데? 내가 아는 애야?”
소년은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응. 말해도 될지… 잘 모르겠어서. 근데… 말하고 싶긴 해.”
부끄러워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설화의 얼굴에 홍조가 띠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는 소년의 심장은 미치도록 쿵쾅 뛰었다.
대체 누군데. 누가 설화의 마음에 들어간 거지.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질투심에 의조는 억지로 얼굴에 잔뜩 힘을 주어 표정 관리를 했다. 단 몇 분 사이에, 목이 바짝 말라왔다.
조금만 더 걸으면 설화의 집이었다. 어영부영하다간, 답을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소녀와 함께 걷는 밤길 한가운데서, 사내의 머릿속으론 이 생각 하나밖에 들지 않았다.
설화의 답을 꼭 들어야만 해. 그리고 어쩌면, 나로서도 오늘이야말로 용기를 내야 할 날일지도 몰라. 더 늦어지면 안 돼.
기백이 느껴질 정도의 비장한 다짐과 함께, 침을 꿀꺽 삼키며 그녀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어… 어? 어?!”
화들짝 놀란 목소리가 긴장을 머금은 입 밖으로 거침없이 터져 나오며, 요동치는 시선이 손으로 향했다. 사내의 손이, 설화의 손에 붙잡혀있었다.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바라보자, 설화 역시도 의조와 같은 얼굴을 하며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설화야. 왜 그래?”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이미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설화는 말없이 사내의 손을 잡은 채로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눈을 마주 보자, 의조는 사람의 심장 소리가 이렇게나 커질 수가 있다는 것을 난생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 소년에겐 온 세상의 소리를 합친 것보다도 자신의 심장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그런 소년을 앞에 두고, 소녀가 말했다.
“더 이상… 늦으면 안 될 것 같아.”
“뭐… 뭐가? 말해. 괜찮으니까.”
설화는 손가락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있잖아, 의조야. 너랑 지수가 같이 있는 걸 보면서… 내 마음이 어떤 건지 오래 생각했어. 말하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숨기는 게 나은 건지… 정말 많이 고민했거든.”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의 끝을 부드럽게 다듬었다.
“그래도… 이제는 말해야 할 것 같아. 이걸 계속 품고만 있으면, 더 이상 앞으로 못 나갈 것 같아서.”
의조는 숨을 삼켰다. 가까스로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분명했다. 그래. 이건 고백이었다.
심장이 쿵, 쿵, 거칠게 목까지 뛰어올랐다. 손끝이 저릿해지고, 시야가 조금 밝아지는 듯했다.
“괜찮아. 이렇게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사실은… 사실은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어. 나도 널….”
마음속에 오래도록 품었던 고백이 드디어 닿으려 하던 그때, 설화의 목소리가 겹쳤다. 하지만 방향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지수를… 좋아해.”
의조는 그대로 굳었다.
“…어?”
말뜻을 이해하기까지, 단 몇 초가 필요했다. 한데, 그 몇 초가 숨조차 멈춘 듯이 길었다.
“나, 예전부터 지수를 좋아하고 있었어.”
설화는 숨을 고르며 이어 말했다. 뛰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정직하게.
소년은 눈을 한 번, 천천히 깜빡였다.
지수면… 내가 아는 남자애 이름 중에, 다른 지수가 있었나? 내 주변에 지수라는 이름을 가진 애는….
자리에서. 의조의 귓가로만 목소리 하나가 메아리로 울렸다.
‘어쩌라고, 역겹게 쳐다봐….’
얘밖에… 없어. 김지수.
맨날 성질 긁고, 눈싸움하면 내 눈 보고 역겹다하는, 그 여자애밖에 없는데.
‘지금 설화가 말하는 지수가, 그럼….’
소년의 시야가 잠시 텅 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