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설화는 서두르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다만 솔직한 마음을 조심스레 놓았다.
“혼자 마음만 품고 있었는데… 너한테만큼은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아니… 너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어, 어? 어….”
입술은 멍하니 벌어져 있는데, 그 안에서 꺼낼 말이 없었다. 분명 계절이 겨울인데, 서늘한 땀이 흐르면서 등이 젖어갔다.
“지수… 를 좋아해? 지수… 좋아하고 있었어?”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겨우 끌어낸 말은, 설화의 고백을 그대로 되묻는 것뿐이었다. 마치 잘 만들어 두었던 문장이 한꺼번에 지워진 것처럼. 소년의 생각과 감정은 모두 삐걱거리며 헛돌았다.
“미안해. 너도… 놀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근데 막상 말하고 나니까… 내가 조금 성급했나 싶어서….”
설화는 눈가를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훔쳤다. 울음을 참고 있는데도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흔들릴 듯 떨렸다.
의조는 하얗게 비어버린 머릿속을 억지로 붙잡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우, 울지 마… 설화야. 나… 안 놀랐어. 괜찮아.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자체로 괜찮은 거니까.”
“네가 지수랑 제일 가까운 사람 같아서… 그래서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한테… 뭐라고 해줄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고….”
말이 점점 작아졌다.
“근데… 아니었나 봐. 내가 너무 혼자 앞서갔던 것 같아.”
숨을 들이켰다가, 거의 들릴 듯 말 듯하게 덧붙였다.
“…그냥, 오늘 들은 말은… 조금만… 잊어줘도 돼.”
손끝까지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사과하려는 마음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흔들리는 말투.
빛이 불안하게 번쩍였다 꺼지는 가로등 아래에서의 몇 초가, 소년에게는 지나 보낸 오늘 하루의 시간보다도 길게 느껴지더랬다. 소년은 잠시, 속으로만 지금 상황을 천천히 정리했다.
설화를 좋아하는 나. 그 설화는 지수를 좋아한다. 그 지수는 설화의 마음을 모른다.
이 단순하고도 복잡한 도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이해도, 감정도, 말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래도, 설화가 지금 떨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그렇게 선 자리에서 머릿속은 계속 삐걱거리며 헛돌았다. 그리고 결국, 생각보다 먼저 입이 움직였다. 마치 고장 난 태엽이 마지막으로 한 번 돌아가듯, 말이 툭 하고 새어 나왔다.
“설화야.”
“응….”
“…내가 도와줄게. 큰 도움은 못 주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다 해볼게.”
잠시 숨이 멎은 듯 조용해졌다.
“…정말… 그렇게 해줄 수 있어?”
“응. 그리고 이건… 너랑 나 사이에만. 지수한테는 말 안 할게.”
눈가에 걸려 있던 눈물이 또렷이 흔들렸다. 설화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 다가섰다.
“…의조야.”
그 한 번 부르는 말 안에 감사, 의지, 죄송함, 안도가 모두 얽혀 있었다.
소녀는 그의 어깨에 천천히 이마를 기댔다. 급하게 안기지 않고, 살짝 기대는 느낌.
“아…!”
“고마워… 너… 정말 고마워.”
말은 작고, 숨이 조금 떨렸다.
“지금… 네가 이렇게 말해줘서… 나, 진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소년은 어쩔 줄 몰라 허둥댔지만, 그 말은 설화에게 너무도 컸다.
“어… 어. 알겠어.”
자신의 품에 안긴 소녀의 어깨를 어설프게 토닥이며, 소년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애먼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설화를 집 앞까지 바래다준 의조는 인사를 하기 전, 그 애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일부러 장난스러운 말투로 농담을 건넸다.
“설화야! 눈물 닦고 들어가. 벌써부터 차인 얼굴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민망하게 정말, 하하!”
그의 장난에, 설화는 눈가를 손가락으로 꾹 한번 누르며 작게 웃었다. 웃음은 여전히 조금 젖어 있었다.
“응… 알겠어. 아까는 좀… 내가 너무 울었지? 미안해.”
조금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들고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바래다줘서 고마워. 진짜로. 그럼… 내일 보자, 의조야.”
“응… 내일 보자!”
설화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문이 닫힐 때까지도, 그녀는 한 번 더 뒤돌아보지 않았다.
설화를 애써 웃어 보내고 난 뒤, 의조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발끝만 맴돌던 시선이 천천히 바닥을 끌며 걷기 시작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밤길을 따라 걸었지만, 마음만은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설화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 근데 그 사람이 지수라니, 동성이라니….”
“설화가… 지수를 좋아한다고…? 그것도, 그런 방식으로…?”
말이 될 듯 말 듯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흩어졌다. 생각은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고, 그렇다고 멈추지도 않았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쩌렁하게 울렸다. 그 소리에 마치 뺨 한 대를 크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억지로 돌아왔다.화면에는, 기막힌 타이밍으로 김지수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아, 왜 또.”
잠시 숨을 고르고서야,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익숙하게 퉁명스러운 지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집 아니었어? 어디야? 아까 반찬통 줘야 했는데 영화 보다가 깜빡했다.”
“아… 그래? 미안. 잠깐 밖에 산책 좀 나왔어.”
의조의 말이 끝나자, 스피커 너머로 짜증 섞인 기운이 그대로 전해졌다.
“야 지금 몇 시인데 산책이야. 추워 죽겠는데! 빨리 와. 내가 집 앞에서 기다려야겠어?”
“아니야 김지수. 그러지 말고 문 앞에 두고 가. 나 좀… 늦을 것 같아.”
“우와, 가지가지 하네 진짜. 문 앞에 두고 가면 얼어 터져 멍청아. 됐고, 내일 가져다줄게. 아 진짜. 너 내일 등굣길에 가방 셔틀 확정이다.”
“예… 미안합니다. 잘 들어가고. 내일 보자.”
“아씨, 아침에도 네 얼굴을 봐야 돼….”
뚝. 통화가 끊겼다.
사내는 몇 걸음 걷다 멈추고, 다시 몇 걸음 걷다가 또 멈춰 서는 걸 반복했다. 생각은 도무지 굴러가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이 굴러서 의미를 잃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한순간에 받아들이기엔, 그 파도가 너무 컸다. 몸이 먼저 굳고, 마음은 따라오지 못했다.
“아아… 진짜… 미치겠네.”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다가, 의조는 결국 땅을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뛰면 생각이 잠잠해질 것만 같아서. 아니면, 최소한 지금의 마음을 잠시라도 떼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밤거리의 찬 공기가 폐 속 깊은 곳까지 밀려들었다. 숨이 가빠오는데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도망이 아니라 버티기처럼. 오늘 밤은, 아무리 지쳐도 쉽게 잠들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