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이 있을 때의 온도

2화

by 전석표

“잠깐! 사진 한 번만 찍고 마십시다요.”


그 말에 의조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대하며 말했다.


“지수야, 그냥 좀 마시면 안 돼?”

“응 안돼.”


의조의 불만을 가볍게 무시한 지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다.

찍은 사진을 집중하며 훑던 지수는 결과물이 만족스럽다는 듯, 혼자 흡족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제야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크…! 이 떫은 흙탕물 같은 맛. 좋아, 아주 좋아!”

“흙탕물은 무슨 상식적으로 누가 흙탕물을 돈 주고 사 마셔.”

“응, 너한테 말한 거 아니니까 신경 꺼요.”

“얘가 진짜, 또 재수 없게 그래.”

“또 역겹게 쳐다보지 말라고.”


앉자마자 또다시 시동을 거는 둘을, 설화는 말없이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년과 투덕대던 지수가 설화에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눈빛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설화도 마셔봐! 여기 진짜 잘하는 데야.”

“어? 아, 응!”


조심히 빨대에 입을 가져대다며 쫍하고 빨아들였다.


“…맛있어.”


귀한 거라도 접한 것처럼, 안 그래도 동그란 설화의 눈이 더욱 커졌다. 소녀의 반응을 본 지수는 이마에 손을 탁 짚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화야, 진짜, 아.”

“응? 아! 내가 좀 그랬구나… 미안해.”


설화가 눈치를 보며 지수를 바라보던 그 순간.


“아니! 넌 왜 이리 귀여운 거야? 네가 어떻게 나랑 동갑일 수가 있어? 19개월 아니야?”


으흐흥,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윽고 지수는 소녀를 와락 끌어안고는 볼을 비벼댔다. 품에 쏙 안긴 아이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설화 그냥 내 동생 하면 안 돼? 권설화 말고 김설화해. 언니가 잘 해줄게요, 응?”

“어휴, 참… 아뜩 뜨거워!”


눈꼴 시렵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의조는, 말없이 유자차를 마시다 혀를 뎄다.

소녀를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지수의 손길에 애정이 가득했다. 그러던 도중에, 물끄러미 고개를 소년에게 돌렸다.

의조도 뚱한 얼굴로 자신을 향한 시선을 마주 보자, 지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소년을 향해 말했다.

“송의조.”

“아, 왜!”

“지금 나 보면서 무슨 생각 들어?”

“뭐? 갑자기 뭔 소리야.”

“너 부럽지?”

“뭐…?”


지수의 돌발적인 물음에, 소년은 유자차를 마시다 사레를 들렸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얘는?”


동요하는 소년의 반응을 눈치챈 지수가, 더욱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몰아붙였다.


“너도 나처럼 설화 막 끌어안고, 머리도 쓰다듬고! 그러고 싶은데 못 하니까 막 속 타지? 그렇지? 너, 이런 거 못 하잖아?”


으하하! 지수의 웃음에 소년은 괜히 목을 가다듬었다.


“야 미쳤냐고, 애 숨 막혀 죽겠어, 놓으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애를 써 말하면서도 빨개진 얼굴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부끄러움에 괜히 딴 말로 빠르게 주제를 돌렸다.


“나 시간 없어, 곧 운동 가야 돼. 얼른 마시고 일어나기나 하자.”


소년의 말에, 지수의 품에 안겨 있던 설화도 호응했다.


“그렇구나. 지수야, 그러면 우리도 얼른 마시고 일어날까?”

“에잉! 그대들, 어찌 이리 여유가 없단 말이오.”


지수는 설화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의조를 보며 싱겁게 혀를 찼다. 남아있던 아메리카노를 모두 마시고 나서 일어나려고 했다. “아 맞다.” 무언가 번뜩 떠오른 지수가 다시 설화를 보았다.


“설화야, 혹시 오늘 저녁에도 시간 괜찮아?”

“밤에? 딱히 할 일이 없긴 한데.”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소녀가 내놓은 답에 지수는 멀뚱히 선 둘을 번갈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 지수를 바라보는 의조의 눈빛이 불안했다.


“괜찮으면 설화도 우리 집에 와! 저녁에 집에서 영화 보기로 했거든. 송의조도 오기로 했어! 맞지? 땡중?”


지수의 눈빛이 의조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동공에 지진을 일으켰다. 그런 얘기 한 적 없었는데?

눈치 없는 입이 또 한 번 스스로 제명을 단축할 뻔하던 찰나, 지수의 살기 서린 눈이 소년의 입안에 돌아다니는 엉성한 말들을 목구멍 뒤편으로 쑤셔 넣게 했다. 의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에서 튀어나올 문장을 급하게 재정비했다.


“오기로 했잖아요. 그쵸?”

“오, 오늘만 기다려오긴 했지. 넌 그걸 굳이 또 물어?”

“설화는? 응? 설화도 와서 같이 보자.”


지수가 두 손을 모아 깍지를 끼며 눈을 반짝이자, 설화는 반달눈이 되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지수랑 영화 보는 거, 좋아.”

“오예! 그럼 이따 또 만나는 거야. 가자!”


지수는 설화와 함께 팔짱을 낀 채로 카페를 나갔다. 둘의 뒷모습을 보며, 의조는 짧은 머리를 멋쩍게 긁적였다.


“설화야, 이따 연락할게!”

“응! 조심히 가, 이따 봐! 지수야, 의조야!”

“응, 너도 조심해서 가.”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 엇갈리면서 셋은 인사를 나누었다. 의조는 멀어져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헤헤, 저렇게 예쁠 수가 있나 싶―”


드아악! 소년의 옆구리로 힘이 가득 실린 훅이 무자비하게 꽂혔다. 몸이 구부러진 의조에게서 통곡의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나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고개를 돌리자, 지수가 성이 잔뜩 난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라는 물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넌 어떻게 애가 눈치가 그렇게 없을 수가 있냐?”


일갈하는 지수를 보며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을 짓자, 그 모습에 오히려 더 말문이 터진 지수는 대차게 쏘아붙였다.


“좀! 어? 설화 옆자리에 앉아보기도 하고! 설화랑 장난도 좀 쳐보고! 그걸 하라고 내가 일부러 카페를 잡은 거잖아!”

“그런 거였어? 난 네가 당연히 옆에 앉을 줄 알았… 아! 아흑! 때리지 마!”


답답하기만 한 의조의 모습이 열불이 나, 거침없이 팔뚝에 주먹을 꽂았다.


“진짜 아파! 나는, 그! 내가 옆에 앉으면 설화가 불편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거지!”


소년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쳐도 지수는 강렬히 소년을 노려보았다. 눈 안에 대형 화재가 일어나고 있었다.


“밥상을 차려주면 뭐 해! 네가 그 밥상 다 뒤집어엎는데! 네 이렇게 눈치 없이 굴 때마다, 내가 진짜 도와주는 게 맞는지 의심이 들어! 이게 도움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야? 어! 답답해 죽을 거 같아!”

“귀에… 이명 들리는 거 같아.”

“일부러 그러는 거야? 너 내가 도와주는 게 싫은가 봐? 그럼, 도와주지 말까?”


지수의 울화통에 소년은 풀이 죽어 묵언수행을 하는 승려처럼,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괜히 뒤통수를 긁적이는 의조를 보며, 지수는 긴 한숨을 쉬었다.


“오늘 영화 볼 때는 네가 설화 옆에 앉아.”

“….”

“난 좀 떨어져 있을 거니까. 그러니까 얘기 좀 해. 장난도 좀 치고. 새 학기 시작한 지가 언젠데 지금까지 아무것도 못 한 건 너무하잖아.”


지수의 말은 화가 난 말투였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고백 못 하면 어떡할 건데? 진짜 그냥 평생 내 옆 들러리로 남을 거야? 지금 고백해도 이미 늦은 편이야, 이놈아…”


말끝에서, 지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가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잖아.”


의조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나도… 네가 도와준 거 항상 고맙게 생각해. 오늘은… 진짜 잘 해볼게.”


지수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더니, 툭 하고 말했다.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가, 같이 가야지!”


호되게 혼난 소년은, 주춤거리며 지수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웃기고, 또 조금 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