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첫 페이지

1화

by 전석표

겨울은 유난히 조용한 계절이었다.

스무 살을 바로 앞두고 있었던 그해의 겨울은, 지나고 보니 유독 오래 남는다.


사랑이라는 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마음은 끝에 도착해도, 심장은 한참 뒤에야 따라오는 법이라서.


나는 아직도 그 계절을 기억한다.

첫눈이 내리던 날, 서로를 부르던 목소리, 말하지 못했던 마음들, 놓아야 했던 사랑의 무게를.

이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의 심장에 남아있는, 끝나지 않은 첫사랑에 대한 기록이다.




툴툴거리며 걷는 여자아이의 미간이 좀처럼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삐죽 내미는 입에선, 볼멘소리가 총알처럼 쏘아졌다.


“왜 우리 학교만 수능 끝나도 학교 나와야 하는데? 나와서 할 게 뭐가 있다고?”

“왜? 딴 곳은 안 그래?”

“아, 우리만 그러니까 말하는 거 아냐 멍청아!”

“…얘는, 어렸을 때부터 말버릇 안 좋은 게 하나도 안 고쳐졌어. 불치병 같아.”

“어쩌라고, 땡중아.”

“야, 이건 스님이 아니라 그냥 모자라게 자른 거라고!”


의조와 지수가 티격태격하며 학교 정문 문턱을 넘으려 하던 그때였다. 뒤에서 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수야, 의조야! 같이 가요!”

‘응?’


뒤돌아 확인한 목소리의 정체는, 지수의 친구인 설화였다.

뒷모습만 봐도 둘인 걸 알아본 듯, 저 멀리서 아이가 뛰어오고 있었다. 아이를 보자마자 소년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설화구나? 얼른 와!”


뛰어오는 설화를 향해, 지수는 자리에서 방방 뛰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느새 둘 앞에 선 소녀는 무릎에 손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며 바쁘게 말했다.


“아이고, 힘들어! 같이 가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잠깐 부르셔서…!”

“설화, 쏘리! 우리가 기다려줬어야 했는데.”


지수의 뒤로 의조도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미안해, 더 기다릴 걸 그랬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수는 바로 소년이 들으라는 듯이 이간질을 걸었다.


“설화야 글쎄, 송의조가 빨리 나가자고 보채는 거야 진짜. 어휴! 정말이지, 들들 볶는 거야 나를!”


지수의 말장난에 화들짝 놀란 의조는 손까지 내저으며 다급하게 부인했다.


“뭔 소리야 지금! 아니야 설화야, 쟤 거짓말하는 거야.”

“애니얘 설화얘, 쟤 거짓믈 하는 걔양.”

“아 진짜, 김지수 넌….”


자신의 말을 우스꽝스럽게 따라 하는 지수를 보며, 기분 나빠진 소년은 미간을 찌푸렸다.


“없는 말 좀 만들어내지 마라. 재수 없게 그래.”

“어쩌라고, 역겹게 쳐다봐….”


그새 눈에 불을 켜고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설화는 둘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둘은 붙어있을 때마다 왜 이렇게 싸워? 근데… 재밌어.”


투덕거리는 의조와 지수. 그 둘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짓는 설화까지. 셋은 저마다 다른 보폭으로 걸었다. 시시껄렁한 얘기와 함께 주택으로 가득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셋의 앞으로는 왼쪽에는 건널목, 건너편엔 아랫동네로 향하는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셋은 그 길목에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는데, 설화는 항상 두 사람이 먼저 건널목을 건널 때까지 기다려주고 나서야 늦게 발걸음을 떼곤 했다. 빨간 불을 띄우고 있는 신호등의 불빛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자리에서, 지수는 설화를 보며 물었다.


“설화야! 나 송의조랑 카페 갈 건데, 너도 지금 시간 되면 같이 갈래?”


지수의 물음에 설화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지수 너랑 의조랑 같이? 난… 좋아!”


설레여하는 설화와는 대비되게, 의조는 금시초문이라며 어리버리한 얼굴로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수가 발끝으로 그의 발을 슬쩍 밟았다.


“의조야, 나도 같이 가도 돼?”


설화의 반달눈이 된 웃음이 소년을 향했다. 그 웃음은 언제 봐도 마음을 부드럽게 건드렸다. 의조는 쿵 내려앉는 가슴을 애써 다잡고, 조금은 무심한 듯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더 부드러워졌다.


“어? 아, 물론이지. 같이 가자 우리.”


그 말에 설화의 웃음은 더 크게 활짝 피어났다. 눈이 진짜 반달처럼 접혔다. 그게 설화라는 사람의 가장 예쁜 순간이었다. 지수는 흐뭇하게 그 모습을 보더니, 설화의 손을 먼저 잡고 의조보다 앞서 걸었다. 소년만 어정쩡하게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시내에 있는 카페에 다다르자, 설화는 신기해하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나는 아메리카노! 얼어 죽어도 아이스. 송 씨는 뭐 마시나?”

“난 유자차, 뜨거운 거.”


메뉴를 말한 둘은 마지막으로 설화의 답을 기다렸다. 한데. 익숙하게 메뉴를 주문하는 둘과는 달리 설화의 입만은 머뭇거림이 머물렀다.


“설화는? 뭐 마실래?”


설화는 메뉴판을 바라보다가, 손끝이 살짝 조여지는 듯 굳어졌다.


“어… 그게….”

“응? 왜?”


두 사람이 자연스레 바라보자, 설화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나, 이런 데 처음 와봐.”


그 말에, 둘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그래서… 뭘 시켜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


말하면서도,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다.


“그냥… 너희랑 같이 있고 싶어서, 온 거야.”


조심스러운 고백이 바람을 건너 떨어졌다.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조금… 부끄럽네.”


지수가 웃음을 터트리자, 설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 너무 촌스럽지…? 미안….”

“설화야, 너무 귀여워. 설화는 바닐라 라테 마셔. 그거 달고 맛있어.”

“…정말? 그럼… 그거 마실래. 나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


눈이 살짝 반달이 되는 순간이었다. 지수가 의조를 툭 치며 말했다.


“내가 주문할 테니까, 송의조 너 설화랑 미리 자리 잡고 있어.”

“어? 어.”


먼저 자리를 잡은 의조와 설화는 서로를 향해 마주 앉았다. 둘 사이에 잠깐 정적이 맴돌았다. 어색함을 깨기 위해 의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카페를 와본 게 처음이었구나?”


소년의 물음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하며 답했다.


“응. 한 번도 와본 적 없었어. 괜히 너희까지 신경 쓰게 한 건 아닐까… 그게 조금 걱정됐어.”


부끄러워하는 아이를 보며, 의조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아냐 아냐! 그러니까… 신선했어. 앞으로 자주 다녀보면, 또 금방 적응될 거야.”

“그렇겠지?” 소년의 말에 설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웃었다.

“응. 지수랑 너랑, 셋이서. 앞으로도 계속 같이 다니고 싶어.”


둘 사이에 대화가 오가던 그때였다.


“무슨 얘기들을 그리 하십니까?”


지수가 설화의 옆자리에 앉으며, 테이블에 아메리카노와 유자차, 바닐라 라테를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