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더 있고 싶어서

8화

by 전석표

“뭐가 예뻐?”

지수가 바로 추궁했다.


“어? 아… 그 팔이, 아프다고. 뻐근해.”

“진짜 뭐라는 거야.”


또 시답잖게 투덕거리는 사이, 설화가 교실 밖으로 나왔다.


“기다렸지? 미안, 종례가 좀 길었어.”

“하, 역시 문 쌤은 종례를 너무 사랑하신다니까. 이제 졸업하는데 좀 생략을 하든가. 안 그렇냐 설화?”

“선생님이 마지막이라고 더 정성 들이시는 거 같아.”

“설화는 참… 너무 착해서 탈이야. 진짜.”


지수가 장난스레 혀를 찼고, 설화는 살짝 웃었다.

학교를 나와 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항상 셋이서 헤어지던 길목에 다다랐다.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기 전에, 의조는 설화에게 물었다.


“설화야, 오늘 뭐 해?”

“응? 음… 딱히 정해둔 건 없어.”


그 말에 의조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셋이서 밥 먹을래? 지수가 맛집 알아놨대.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설화의 눈동자가 제일 먼저 반짝였다.


“진짜? 지수랑 너랑 같이? …좋아. 나도 가고 싶어. 괜찮아?”

“그럼 같이 가자.”


설화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늘 그랬듯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의조도 따라 웃으려다, 어제의 말들이 문득 되살아났다. 그 순간, 마음 한쪽이 조용히 일렁였다. 입꼬리는 올라갔지만, 속에선 무언가가 묵직하게 움직였다.

밥을 먹으면서도 소년의 온 신경은 모두 딴 세상에 가 있었다. 설화가 지수를 좋아하는 걸 알게 된 지금, 상황이 굉장히 꼬여버렸다.

어젯밤, 설화 앞에서 진지한 척 말하던 자신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영화 속 주인공도 아니면서, 괜히 멋있는 말들만 내뱉었다.


‘아 씨… 말을 왜 그렇게 해버린 거야.’


내가 좋아하는 입장인데, 누가 누굴 도와준다는 거냐. 애초에 도와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지수 쪽 아니냐. 폼만 잡고 책임도 없었던 말들이 지독하게 뒤늦게 와닿고 있었다.


‘책임질 수 있는 말만 하지… 좀.’


이미 엎지른 물 같았다. 머리를 굴려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생각할수록 속만 쓰렸다.

뭐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수저를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문득, 먼 곳에 가 있던 정신을 어느 목소리가 붙잡아 세웠다.


“야, 뭐해?”

“어? …뭘?”


멍하니 고개를 올리자, 들어온 시야엔 설화와 지수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고 있었다. 그중 지수는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왜 숟가락을 코에 붙이고 계신 거죠, 송 의조 님?”

“어? 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진짜로 숟가락이 코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어! 아니야 이거.”


의조는 황급히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지를 찾아 손을 더듬었다. 설화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 지금.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짜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꼴인가.


“미안. 어제 운동하고 잠을 제대로 못 잤나 봐. 정신이 좀… 흐려서.”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방금 상황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지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푸하하! 와, 찍었어야 했는데. 완전 작품이었다. 맞지 설화야?”


설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러지 마. 의조 지금 좀 피곤해 보여.”

“…설화 앞에서는 뭔 말도 못 하겠다, 진짜.”


지수는 투덜거렸지만 입가엔 여전히 웃음이 남아 있었다. 의조는 말없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속은 괜히 더 뜨겁게 끓어올랐다.

음식점에서 나온 셋은 정류장으로 향하려 했다. 한데 거기서, 지수의 핸드폰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엽니다―”

“으, 제발… 밥 막 먹은 사람 앞에서 그 톤 좀….”


의조는 얼굴근육이 자동으로 일그러졌다.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를 이어갔다.


“어, 진짜? 아… 그게 오늘이었지? 와, 이걸 까먹네. 아차차… 나 진짜 당근 많이 먹는단 말이야. 기억력 좋아야 하는데.”


지수의 전화를 옆에서 듣는 의조와 설화는 상황을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말없이 지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통화가 마무리되자, 지수는 둘을 향해 몸을 돌려 그렇게 말했다.


“어쩌나. 오늘은 너희 둘이서 가야겠다.”

“무슨 일 있어, 지수야?”


설화의 물음에, 지수가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오늘 중학교 때 애들이랑 선생님 찾아뵙기로 했던 날이었거든. 완전히 까먹고 있었네.”


그 말을 듣자, 의조는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지금 바로 가야겠네.”

“응… 벌써 다 모였다더라. 미안해, 설화야.”


설화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우리 걱정하지 말고 얼른 다녀와.”


지수는 그제야 의조를 툭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의조야, 설화랑 둘이 가는 거네? 아까 내가 놀린 거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시고요.”

“야! 얘는 애 앞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얼른 가기나 해라! 애들 기다리게 만들지 말고,”


당황한 의조가 얼버무리니 지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눈썹을 씰룩이다가 손을 흔들어 인사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멀어져가는 지수의 뒷모습이 어느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자, 그 자리엔 둘만이 남았다.

의조는 마음 한구석이 미묘하게 설렘과 불편함 사이에서 뒤엉키는 걸 느꼈다. 고마움 같기도,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 같기도 했다. 힐끗 옆을 보니, 설화가 지수가 사라진 방향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끝에 아주 얇게, 아쉬움이 내려앉아 있었다.


“지수랑 같이 더 있고 싶었는데… 아쉽다.”

“오늘 약속 있었나 보네. 어쩔 수 없지.”

“응. 어쩔 수 없지.”


설화는 손을 꼭 쥐며 스스로를 다독이듯 작은 힘을 주었다. 그 단단히 쥔 작은 손이 의조의 눈에 들어왔다. 귀엽다고 느끼며 가슴이 살짝 저릿해졌다. 둘만 남았다는 사실이, 기대와 망설임 사이에서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다. 그때, 문득 기억 속에서 무언가 번쩍하고 떠올랐다.


“설화야.”


의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내까지 나온 김에… 나랑 좀 더 놀다 갈래?”


소년의 말에 설화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

“당연하지. 그냥 바로 가긴 좀 아쉽잖아. 시간도 괜찮고.”


그렇게 말하자, 소녀도 소년과 같은 생각을 나누었는지 표정에도 금세 밝은 기색이 번졌다.


“맞아, 아쉽긴 했지.”


입가에 작은 웃음이 피었다.


“그럼… 뭐 하고 싶어?”


의조는 숨을 정리하듯 한 번 들이쉬고 말했다.


“진짜 재밌는 데 알아. 스트레스 쌓이면 친구들이랑 자주 갔던 곳이야.”


설화의 눈이 반짝였다.


“오… 궁금하다.”


의조도 따라서, 천천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