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미, 미안…! 나, 진짜… 놀라서….”
설화가 허둥지둥 손을 떼며 말했다. 의조도 괜히 어색해져서, 엉뚱한 말부터 내뱉었다.
“아니, 괜찮아. 그… 게임이 난이도가 최하 난이도 맞나? 방금 거의 실전급이던데?”
설화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 아직 가슴이 두근거려. 집 가면 오늘 이 장면 또 생각날 것 같아.”
“나도. 와… 나는 이마에 땀 났어. 봐봐.”
“진짜네…! 너 완전 몰입했었구나.”
서로의 숨이 금방이라도 들킬 것 같은 느낌. 둘은 괜히, 게임 얘기를 더 늘려 잡았다.
“이게 제일 쉬운 난이면… 제일 어려운 건 도대체 뭐야…?”
“상상도 못 하겠다. 우린 지금 걸로도 충분히 무서웠어.”
게임장 밖으로 나오니, 하늘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어스름해지고 있었다.
“헉, 우리 생각보다 오래 있었나 봐. 벌써 해가 지네.”
“그러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슬슬 가야겠다.”
소년은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빠르게 정류장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빠야 할 걸음을 늘여놓기 직전에 문득 소녀의 목소리가 소년을 붙잡았다.
“저기… 의조야!”
“응?”
설화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소년은 바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설화는 잠깐 말을 고르더니, 이내 두 손가락을 가볍게 맞부딪힌 채 조심스레 말했다.
“시내에… 내가 가끔 가는 도서관이 있어. 오늘 빌리고 싶은 책이 있어서. 혹시 괜찮으면… 같이 가줄 수 있을까? 아, 물론 집에 일찍 가야 하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의조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괜찮지. 가자. 같이.”
“…정말?”
“응.”
설화가 환하게 웃었다. 의조는 또 아무 방어 없이 마음이 무너졌다.
도서관에 도착하자, 차분한 공기가 둘을 감싸 안았다. 책 냄새와 종이 냄새가 익숙하게 내려앉은 공간.
“주말엔 가끔 여기 와. 책 읽다 보면… 밖이 밤이 되어 있을 때도 있어.”
“오… 진짜 좋아하는구나.”
“응. 그냥… 조용해서 좋아.”
설화는 이야기하면서도, 말 한끝 한끝이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의조는 그런 설화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이런 걸 모르고 살았구나.
자신이 평소에 읽었다고 할 만한 책이라곤, 초등학교 때 빠삭하게 외웠던 그리스 로마 신화뿐이라는 사실이 떠올라 조금 머쓱해지기도 했다.
“멋있다.”
“응?”
“그렇게 좋아하는 게 있다는 거. 멋있어 보여.”
설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잔잔하게 웃었다.
“…고마워.”
짧은 미소였는데도, 의조는 그 순간을 오래 붙잡고 싶어졌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도서관을 찾아와 자료실로 들어서자, 둘은 책 읽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책을 찾았다.
열람실 안에 비치된 컴퓨터로 자료를 검색하니, 소녀의 바람대로 읽고 싶던 책이 다행히 도서관에 남아있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을 찾은 둘은, 곧장 카운터로 가 책을 빌렸다.
“읽으시고, 28일 전까지 돌려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도서관을 나오자, 설화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의조가 옆에서 물었다.
“읽고 싶었던 책이… 나태주 시인 시집이었구나?”
설화는 시집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제일 좋아하는 시인이야. 이번에 새로 나온 시집이라 여기엔 없을 줄 알았는데… 있어서 너무 다행이야. 주말 동안 천천히 아껴 읽어야지.”
“좋겠다. 딱 원하는 책을 찾았네.”
의조도 어느새 비슷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류장까지 걷는 동안, 둘은 가벼운 대화를 이어갔다.
“집 가면 뭐 할 거야?”
“씻고 바로 누울래. 오늘 좀 많이 걸었지? 의조는?”
“나도 운동 좀 하고… 밥 먹고 나면 바로 잘 것 같아.”
“음, 그렇구나.”
정류장엔 사람들이 북적였다. 마침 버스 한 대가 불을 켜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 저거. 나 저 버스 타야 해.”
“어? 벌써…?”
의조는 잠깐 굳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만 더 늦게 흘러줬 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버스가 멈췄다. 설화가 의조를 보며 미소 지었다.
“조심히 들어가. 오늘… 정말 재밌었어.”
“응. 나도. 잘 들어가.”
버스를 기다리며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버스는 금방 도착해 버렸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처음으로 단둘이 오래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조는 마음을 다독이듯 웃어 보였다. 설화가 버스에 오르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데, 의조는 문득 멈춰 서서 눈을 가늘게 떴다.
버스 앞 승하차 태그기 앞에서 설화가 멈춰 서 있었다. 잠시 후, 작은 기계음이 정적을 잘랐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아!”
소리를 듣자마자 소년은 고민할 것도 없이 빠르게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에 올라탄 의조는 기사 아저씨에게 바로 인사하며 그렇게 말했다.
“두 명이요! 저 앞에 있는 애까지요.”
놀란 설화가 고개를 돌렸다.
“어? 의조… 너 왜…?”
의조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니까 나도 이 버스 타도 되더라고. 같이 가면 되지, 뭐. 괜찮지?”
설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점점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면.”
“아니라니까. 저기 자리 있다. 빨리 앉자.”
능청스럽게 넘기며 둘은 버스 뒷자리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설화는 여전히 손가방 끈을 꼭 쥔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버스 카드 충전했어야 했는데… 깜빡했나 봐. 하마터면 혼자 덜렁 내릴 뻔했네. 미안해… 버스비는 꼭 다음에 돌려줄게.”
“됐어. 진짜 괜찮아. 나야 너랑 좀 더 같이 가서 좋은데?”
의조는 태연한 척 말했지만,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둘이 타는 버스는 원래 달랐고, 집도 전혀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크게 돌아가게 된 길이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더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었다.
수많은 정거장을 지나 보낸 끝에, 설화가 내려야 하는 정류장에 도착했다. 의조도 태연하게 소녀를 따라 내렸다. 설화는 의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응? 의조 너는 왜 여기서 내려? 집 근처까지 간다고 하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