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을 듯, 머무는 거리

11화

by 전석표

“…아, 그게.”


순간 당황했지만, 의조는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가끔은… 버스 한 번에 쭉 가는 것보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가는 게 좋더라고. 그냥… 생각할 시간도 되고. 운동도 되고.”


말하고 나서도 스스로 어색하다는 걸 느꼈지만, 설화는 별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 느낌 알 것 같아.”


잠시 침묵이 스쳤다. 의조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설화야. 오늘도… 집까지 바래다줘도 될까? 어차피 여기서 내렸으니까.”


설화는 한 박자 머뭇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 정말 잘 갈 수 있어. 너 운동도 해야 한다며? 나때문에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오늘은 여기서 인사하자?”


부드럽지만 단단한 거절이었다.

의조는 입술을 깨물며 말문을 찾았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마음속에만 있어야 했던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너랑 같이 있으면… 그냥 좋아서 그래.”


말을 끝낸 순간, 의조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깨달았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그, 친구랑 같이 가다가 헤어지기 아쉬울 때 있잖아. 그냥… 그런 느낌 말이야. 알지? 어… 그런 거.”


서투른 변명 같았지만, 그 속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설화는 의조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 알아. …의조는 참 다정하다.”


잠시 멈추고, 설화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오늘도… 부탁해. 같이 가줘.”


“어, 어, 그래! 좋아!”


의조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소녀와 나란히 걷는 그 순간, 그의 가슴속에는 조용한 불빛이 하나 켜지는 듯했다.

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오늘 함께 보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생각할수록 지수가 밥만 먹고 먼저 자리를 비킨 건, 어쩌면 기적 같은 우연이었다. 의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밥은 내가 사줄 걸 그랬다….

정류장에서 소녀의 집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였다. 조금만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집이 눈앞에 보였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의조의 발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아쉬움이 그대로 보폭에 배어들었다. 아무리 시간을 늘여보려 해도 도착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집 앞에 멈춰 선 설화가, 조용히 뒤돌아보았다.


“오늘… 정말 재밌었어, 의조야. 실은 나, 이렇게 놀아본 거… 처음이었어.”

“정말?”


의조의 눈이 커졌다. 설화는 부끄럽지만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너무 좋았어. 고마워.”


설화의 웃음은 달빛 아래에서 한층 더 부드러웠다. 의조도 따라 웃었다. 그는 소녀가 웃을 때 눈이 반달이 되는 그 모습을 정말 좋아했다. 잠시 머뭇대던 의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설화야.”

“응?”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마음을 꺼내놓았다.


“나도… 오늘 정말 즐거웠어. 그리고…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너랑 자주 이렇게 함께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뒤, 의조는 괜히 손바닥에 땀을 닦았다.


“그… 주말에 도서관도 같이 갈래? 나도 책 좀 읽어보고 싶어. 네가 좋아하는 책들… 추천받고 싶어서.”

설화의 눈빛이 아릿하게 흔들렸다가, 금세 따뜻함으로 번져 갔다. 그녀의 표정은 조용히 풀려 있었다.

“그래. 그러자.”

“정말?”

“응. 나도 좋아.”


의조의 어깨가 가볍게 풀렸다. 얼굴이 활짝 열려버리는 건,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다….”


그는 소리내 환호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 그 한숨 속엔 기쁨과 안도, 그리고 아주 조금의 용기가 함께 묻혀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이 바닥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짝사랑하는 입장에서, 또 다른 사람을 짝사랑하고 있는 설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답을 찾기 어려운 생각들이 발목처럼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나니, 소년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어쩌면 괜히 어렵게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다른 게 아니라, 그냥 이렇게, 지금처럼 설화와 조금씩 가까워지면 되는 거다.

물론 설화에게 도와주겠다고 말하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는 설화의 마음도 조금은 내 쪽으로 기울어올 수 있지 않을까?


“갈게, 설화야!”

“응, 조심해서 가!”


인사를 나누고 소녀가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자, 소년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가슴이 가볍게 부풀어 오른 채로 곧장 보라색이 섞여 있는 붉은 하늘 아래를 달려갔다.

어제와는 달랐다. 오늘은 달리는 발걸음이 기분 좋게 가벼웠다. 집까지 내내 뛰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의조는 주말마다 설화와 도서관에 갔다.

예전에는 지수와 함께 있을 때만 설화 곁에 머물 핑계가 필요했다면, 이제는 아니었다. 둘은 자연스럽게, 아무 이유 없이도 서로를 만나는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시계침이 묵묵히 돌아 닿은 크리스마스이브.

소파에 걸터앉은 지 벌써 30분.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는 소년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으… 한다 말아…?”


손끝이 작게 떨렸다.

한 문장. 고작, 내일 만나자고 말 한마디. 그걸 할까 말까로 30분을 쓴 것이다. 하지만 결국, 소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결심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소녀의 번호 버튼을 눌렀다. 발신음이 울리는 동안, 괜히 목을 한 번 가다듬는다.


“여보세요?”


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소년의 표정이 단번에 풀렸다.


“설화야! 뭐 하고 있었어?”


소녀는 늘 그랬듯, 맑고 소박한 숨결로 대답했다.


“씻고 TV 보면서 딸기 먹는 중이었지, 왜?”

“아… 그렇구나.”


입술을 한 번 눌러 다잡고,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일 크리스마스잖아. 혹시 계획 없으면… 나랑 만날래? 새로 나온 영화 있는데, 너랑 보면 재밌을 거 같아서. 어때?”


심장이 귀까지 울렸다. 제발. 정말 제발. 같이 보내고 싶었다. 그냥… 둘이서. 하지만, 돌아온 목소리는 기대와는 조금 달랐다. 미안함이 스친,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아… 그렇구나.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내일은 가족들이랑 모이기로 했어. 친척들이 오거든….”


바람과 어긋난 한 문장. 소년의 표정이 단숨에 가라앉았다. 아쉬움이 얼굴 한가득 번졌다.


“아… 그래? 응. 그럴 수도 있지. 알겠어. 그럼 다음에 보자.”

“미안해, 의조야. 너도 따뜻하게 보내. 학교에서 보자.”

“응… 학교에서 보자.”


전화가 끊기자마자 소년은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아… 안 돼. 설화랑… 같이 보내고 싶었는데….”


축 늘어진 목소리와 함께, 몸도 힘없이 가라앉았다. 하늘이 아니라 소파에 녹아내리는 액체가 된 것처럼.

그러던 찰나, 핸드폰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오! 뭐야, 설화… 에이 씨.”


혹시나 했던 기대는 잠깐 불꽃처럼 피어올랐다가 바람처럼 사그라졌다.

발신자는 설화가 아니었다. 그저 친구였다. 소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 기대했다가 또 실망하네….”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으니, 바로 대답이 꽂혔다.


“야, 너 크리스마스에 할 거 없지?”


CCTV라도 달아놨나 싶을 만큼 정확한 한 방이었다.


“…본론만.”

“내일 일정 전달한다. 풋살장 예약 완료. 낮에 한 판 싹 조지고, 저녁엔 PC방 레이드까지 풀세트로 간다. 이보다 알찬 크리스마스 있으면 말해봐. 헛소리하면 바로 레드카드야, 알겠냐?”


끔찍했다. 소년이 꿈꿨던 크리스마스는 이런 게 아니었다. 설화랑 같이 보내야 했는데. 요즘 분위기… 아주 좋아지고 있었는데. 이상과 현실의 괴리 앞에서, 소년은 괴롭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친구의 초대는,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했다.


“…풋살화 네 거 하나 빌릴 수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