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조용히 달라지고 있었다

12화

by 전석표

아쉬웠던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고등학생으로서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학교를 나와 길을 걸으며, 지수는 기대가 찬 눈으로 신이 나서 외쳤다.


“아, 드디어 방학이다! 진짜 졸업 코앞이네. 이제 눈 몇 번 감았다 뜨면 스무 살이라고!”

“뭐가 그렇게 좋다고 설레발이야.”

“아, 맞다, 송의조는 군대 가지? 하하!”

“야, 나는 내가 지원해서 가는 거거든? 조국에 푸른 청춘을! 어때, 좀 멋있지 않냐?”

“예 그렇게 좋으면 내일 당장 가세요. 난 대학교 가서 일취월장한 미모를 세상에 뽐낼 거거든요?”


지수의 말에 소년은 대뜸, 눈을 지그시 감으며 기도하는 것처럼 두 손을 모았다. 지수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는데.”

“추모.”

“갑자기? 누구를?”

“너랑 같이 학교 다니게 될 불쌍한 남자.”

“죽는다 진짜.”

“악! 야야! 손매 세다고 했잖아!”


둘은 길을 걷는 내내 투덕거렸다. 결국 지수가 복부에 킥을 정확하게 꽂고 나서야 소년은 조용해졌고, 지수는 다시 평온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1월 1일 되자마자 술집 간다. 민증 딱 보여주고, 그 가게 술 전부 내가 쓸어담는다.”

“그래. 선생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김지수지.”

“알. 바. 아니고요?”

“됐고, 제발 어디 가서 정신 잃고 실려만 가지 마라.”


상상이 가는 듯, 의조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반대로 지수는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이 술 잘 마시거든? 나도 체질 좋을걸. 걱정은 놉. 연초부터 바쁘겠다 진짜. 인기 있는 여고생의 삶… 아니, 이제는 인기 있는 여대생의 삶을 살아야 하니까?”

“낯 하나 안 변하고 저런 말을 하네. 연기하면 주연하겠는데?”

“야. 그 입 좀 잠그고 살자? 또 슬슬 긁네 사람을.”

“…알았어.”


투덕거리던 지수는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의조를 흘끗 보았다.


“아 참. 너 설화랑은 어떻게 돼 가고 있는데?”

“어?”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의조의 눈빛도, 목소리도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어, 그야… 많이 가까워졌지.”

“그게 끝?”

“…응.”


우물거리는 의조의 답에, 지수는 못 참고 입술을 붙였다.


“고백은? 그건 언제 할 건데?”


‘고백.’ 짧은 단어 하나에, 의조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하긴 해야지. 근데… 아직.”

“뭐래.”


지수는 답답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아직이란 말이 나오지? 야, 너 시간 없다니까. 최종 합격하면 초에 바로 들어간다며. 그런데도 아직? 그러다 진짜 놓치면 어떡할 건데?”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에, 의조는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로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생각들이, 막상 지수 앞에서 현실이 되면 쉽게 굳어버렸다. 사정은 지수가 모르는 방향으로 더 꼬여 있었다. 설화가 짝사랑하는 사람이 지수라는 걸… 정작 지수 본인은 모르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야 겨우 설화와 친해졌는데, 바로 고백으로 이어간다는 건 너무 급했다. 소년은 아직, 설화 마음의 나침반이 자기 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지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떠보듯 물었다.


“아무튼 그건 알겠고… 들어봐. 예를 들어서 말이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지수는 입술을 다물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기다렸다는 듯 담백하게 말했다.


“난 그래도 고백은 할 건데?”

“어, 진짜?”

“그런 상황에선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하겠지. 근데 굳이 고르자면… 하고 후회하는 쪽이 낫다 생각해. 최소한 상대방은 알잖아. ‘아, 이 애가 나를 좋아했구나.’ 하고.”

“…맞아. 네 말이 맞네.”


어디 한번 고민다운 고민을 한 적도 없는 사람처럼 툭 던지는데 또 정확했다. 의조는 괜히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근데, 그건 왜 갑자기? 혹시 지금 말한 애가… 네 얘기냐? 설화가 다른 사람 좋아해?”


예리하다 못해 못돼 먹은 지수의 눈이 번뜩이자, 의조는 허겁지겁 손부터 내저었다.


“뭔 소리야 아줌마야! 내가 만약이라고 했잖아, 만약!”


형사 앞에서 취조 당하는 기분. 심장만 따로 덜덜 떨렸다.


“뭐래. 귀신을 속여 귀신을.”

“진짜라고! 그냥… 내 주변에 그런 애가 있어서! 그냥 너한테도 한 번 물어본 거라고! 뭐만 하면 내 얘기래….”


의조에 말에 지수는 ‘허’하고 크게 혀를 차더니 그렇게 말했다.


“참, 팔자 좋으시네? 네 걱정이나 해. 지금 너 멘탈 상태 보면 내가 다 답답해 죽겠다.”

“…알았다니까.”


근래 소년의 얼굴 주름은 바쁘다. 미간으로 모자라, 이젠 얼굴 전 범위로 구겨짐이 퍼져 나가려 하고 있었다. 뭔 부귀영화를 얻어보겠다고 물었나. 머릿속만 더 복잡해지고 말았다. 꿍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데, 옆에서 지수가 무언가를 문득 떠올렸는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근데, 설화 오늘은 왜 말도 없이 바로 갔지? 이상하네.”

“어… 그러게. 반 갔을 때도 없었잖아. 너한테 연락 온 것도 없었어?”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설화가 말도 없이 사라진 적은 없었는데… 조금 이상하네.”

“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걱정이 묻어나오는 의조의 목소리에, 지수는 피식 웃음이 터졌다.


“누가 보면 지가 남자 친구라도 되는 줄, 아, 설화 내 거야!”

“조용히 좀 하세요!”


한참을 그렇게 떠들었던 둘은, 건널목 앞에 서서야 마침내 잠시 입을 쉬었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어? 뭐야, 이거?”


눈앞으로 내려앉는 그것을 확인한 두 사람의 동공이 이윽고 가장자리로 벌어지며 서서히 커졌다.

눈송이였다.

눈송이를 보자마자 둘의 입에서 동시에 똑같은 말이 나왔다.


“…미친! 내 첫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