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면

21화

by 전석표

서로에게서 닮은 표정이 지어졌다. 어색한 공기가 둘을 감싸안았다.

커튼 틈 사이로 세피아빛이 번지는 불 꺼진 교실. 먼저 정적을 깬 건 의조였다.

“지수 찾는 거야? 방금 나랑 있다 헤어졌어. 전화해줄까?”


조금이라도 자연스러워 보이려는 말투였다. 그보다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는 건 설화 쪽이었다. 괜스레 의조는 필요 없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음. 두고 온 게 있는 줄 알고 올라왔거든. 근데 와 보니까… 없더라. 그냥 착각이었나 봐.”

“…그렇구나.”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 사람의 말은 흔들리지 못했다. 설화는 작아진 목소리로 처음으로 사내에게 대답했다.


“난… 가볼게.”

“어? 아… 응.”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지만 사내는 바로 들어왔던 뒷문으로 돌아서려 했다.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설화의 눈빛이 가득 흔들렸다.

굳어있는 몸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입을 떼는 것마저 못해서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표정만은 이래선 안 된다고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 설화에게, 교실 문턱 앞에서 사내가 다시 뒤돌아섰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가에 머뭇거림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그 애를 힐끗 바라보다, 또 한 번 머뭇거리다, 그것을 반복하다가 결심이 선 듯 서툰 용기를 머금은 눈이 그 애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입술이 두 번 떨리다, 겨우 한 줄이 나왔다.


“졸업 축하해, 설화야.”


옅은 미소를 타고 온 말에, 설화의 눈빛에 많은 감정이 일렁였다.

그 문장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는걸, 서로는 알고 있었다. 그런 한마디를 끝으로 의조는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애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사내는 복도를 박차고 뛰기 시작했다. 이유 앞에서 솔직해지지 못한 사내였다.

굳이 비어있을 교실을 올라오고 싶었던 건, 설화 때문이었다. 그때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설화는 분명 아직 떠나지 않고 사내와 같은 곳에 있었다.


혹시나 했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으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모두가 지나간 자리로 유일하게 발길을 되돌린 것이었다. 결국 자신을 맞아주는 건 빈 교실뿐이지만 기억이 만들어내는 그림에는 여전히 그 애가 있었다. 그렇다는 것만으로 사내에겐 헛걸음이 아니었다. 그랬는데 막상 눈앞에, 정말 그 애가 있었다. 사내는 심장이 울렁여서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몸에 온 신경을 써가며 힘을 주지 않으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이런 자신이 멍청해서 사내는 도망치듯이 복도를 내달렸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 얼른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를 빠져나오려 했다. 뜀박질을 멈추지 않고 계속 뛰었다. 그런 사내의 뒤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의조야! 의조야!”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애의 목소리가 아팠다. 바빴던 발이 못이 박혀버린 것같이 나아가지 않았다. 멈춰 선 자리에서 감정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러는 사이에 계단 쪽에서 내려오는 그 애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여기에서 끝나야 했다. 더 이상 앞에 서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정리하지 못한 감정으로 바라볼 때, 사내는 분명 또 무너지고 말 것이었으니. 특히나 나를 바라보는 슬픈 얼굴이라면 더더욱, 거칠게 바닥을 차며 억지로 내달리려던 순간이었다.


“의조야! 가지 마…! 나… 나 너 보려고 온 거야. 제발… 가지 마.”


차마 돌아보지 못한 뒤로 곧 숨결이 닿았다. 이윽고, 손끝이 팔목을 감싸쥐었다. 체온이 먼저 느껴졌다.

자신 없이 뒤돌아선 풍경 앞에, 젖은 눈을 한 그 애가 서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5분만이라도 같이 있어줄 수 있어? 나도…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가에 떨림이 느껴지려 했다. 불안해지려 했다.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건데.”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의조는 굳은 얼굴로, 힘없이 말했다.


“나… 지수 보러 온 거 아니야.”


설화가 말했다. 한 음절 한 음절, 조심해서, 깨지지 않게.


“너 보려고 왔어. 아까도… 계속. 너 기다리고 있었어. 나….”


울먹이는 음성 때문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말없이 그 애를 바라보기만 했다. 설화는 잠시 감정을 누르듯이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너한테 상처만 줘놓고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말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 그래서, 이번엔 피하지 않으려고.”


설화는 일렁이는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몇 초 만에 그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지만 다시, 꿋꿋하게 사내와 두 눈을 마주 보았다. 꼭 쥐고 있는 주먹이 떨렸다. 용기를 내야 한다고 말하는 주먹이었다. 설화는 말하고 싶어 했지만, 확실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 자신이 미운 걸까. 머지않아 하염없이 눈물이 앞서 떨어졌다. 작은 어깨가 연약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설화는 얼굴에 힘을 주려고 했다. 곧, 애절한 목소리가 정리되지 않은 문장들을 띄엄띄엄 전했다.


“나 같은 애를… 좋아해 준 사람이 네가 처음이었어. 정말로. 부족한 것밖에 없는 나한테… 그렇게 진심으로 웃어준 사람도, 너뿐이었고.”


말을 꺼낼 때마다, 숨이 부서졌다.


“그래서… 고마웠어. 정말로. 그 마음… 나한테 너무 소중했어. 그게… 사라지는 게 무서워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거야.”


설화는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조그맣게 떨렸다.


“상처만 주고 가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무서웠어. 그래도… 네가 나를 좋아해 줬던 그 시간들은… 내가 잊지 않을 거야. 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