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위의 단추 (fin)

fin

by 전석표

미안한, 미안하다는 말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서 또 미안한, 그저 미안하다는 단어로밖에 표현이 되지 않아서 아픈 그 애의 고백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고개를 떨구며 눈물로 젖어가는 설화의 얼굴에, 갑자기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놀라서 올려다본 시선 앞엔, 눈물을 닦아주는 사내가 있었다. 울음을 가까스로 눌러 담은 목소리로, 의조가 말했다.


“설화야.”

“응….”

“내가 너무 바보 같을 때, 너를 알고 좋아하게 돼서 미안해.”

“네가 왜 미안해!”


둘은 서로가 눈앞에 있는 착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로 풍경이 더욱 선명해졌다. 굳은살 박인 손길이 믿기지 않게 부드러웠다.


“난 한 번도…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거든. 근데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더라도… 결과가 똑같다 해도… 나는 또 너를 사랑했을 거야. 몇 번이고.”


온갖 많은 것이 변해가게 될 세상에서, 언제까지나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일 사랑을 그 애에게 전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에 이른 소년은 품 안으로 그 애를 끌어안았다. 말없이 안으며, 첫사랑을 마음에 새겼다. 서로의 온기가 느껴졌다.

소년은 품에 안긴 소녀의 떨리는 숨결을. 소녀는 소년의 떨리는 심장 소리를 느꼈다.

한참을 안다가 아쉽게 설화를 품에서 놓아준 소년이 가슴에 닿는 교복 재킷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대로, 그 단추를 떼어내더니 설화의 손에 쥐어주었다.


“마지막이니까… 이거 가져가.”

“…단추? 왜…?”


가늘고 하얀 손에 문득 전해진 낡은 교복 단추. 어리기만 한 손바닥에서 시간에 그을린 모습이 티가 났다. 그것을 보며 설화가 물었다.


“예전 일본에선… 졸업식 날 좋아하는 사람한테 심장에 제일 가까운 단추를 줬대. 잊지 말아 달라는 마음으로.”


소년의 말은 눈물로 덮여있던 설화의 얼굴에 웃음을 피워냈다. 슬프지만 따스했다. 그런 웃음이었다.

그 애도 두 손으로 힘껏 자신의 교복 단추를 떼어내서 소년의 큰 손에 쥐어주며 대답했다.


“그럼… 나도 줄게. 이거… 버리지 마. 끝까지 가지고 있어줘.”


서로의 손엔, 서로의 심장에 가장 가까이 있던 교복 단추가 쥐어졌다. 단추를 조심스럽게 만지작대며 둘이서 서로 닮은 웃음을 짓다가, 설화가 교복 주머니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희미하게 빛바랜 연분홍 폴라로이드. 눌렀다 떼면, 작은 사각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우리… 서로 찍어주자. 서로 가진 사진, 계속 간직하기로 하자.”

“…그래. 내가 먼저 찍어줄게.”


둘은 서로를 사진으로 찍어주었다. 둘이 함께 찍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의조는 설화의 사진을, 설화는 의조의 사진을 가졌다.

학교 밖으로 함께 나온 둘은 같은 보폭으로 나란히 걸었다. 작년까지 의조와 설화, 지수 이 셋이서 하굣길에 항상 걸었던 거리였다.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이었지만 어김없이 항상 헤어지는 인사를 나누었던 길목에 가까워졌다. 이제는 둘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풍경이었다.

왼쪽으로는 건널목, 앞에는 아랫동네로 가는 내리막길이 펼쳐진 그곳에서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의조는 집까지 데려다줄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설화도, 그러지 않기로 했다.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설화가 먼저 말했다.


“내 10대 마지막에…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정말 소중했어. 잘 지내, 의조야.”

“내가 가장 서툴던 시기에 너를 좋아하게 돼서 미안해. 그래도… 몇 번이고 돌아간다 해도 난 또 너를 사랑할 거야. 잘 지내, 설화야.”


인사를 끝으로 소년과 소녀는 다른 그림이 그려진 저마다의 길로 걸어갔다.


머리 위로 바람이 불었다.

어느새 눈물이 말라 있었다.

겨울 하늘이 넓고 참 예뻤다.

신호등이 깜빡였다. 그리고, 꺼졌다.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그 길 위에는 두 사람의 사랑만이 조용히 남아있었다.




5년이 지나 때 이른 봄날.

자줏빛 물감이 뒤섞인 노을이 퍼진 하늘 아래, 공군 헌병단 부대 안에서 두 사내가 담배를 나누고 있었다. 초봄이라 해도 쌀쌀하지 않은 건지 옷을 얇게 걸치고 나온 한 사내가 담배 연기를 시원하게 뿜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재떨이에 담배를 털며 그가 말했다.


“하… 이거 참 좋습니다. 내일 전역이지 않습니까! 사회에 나가서도 송의조 하사님이랑 꼭 한잔하고 싶습니다.”


군복 가슴께의 ‘군사경찰’ 글씨가 바랜 듯한 남자는 말없이 담배를 물었다.


“휴가 나오시면 꼭 연락해 주십시오. 제가 아는 여자 동기들이 송의조 하사님, 아니… 의조 형 소개해 달라고 난리입니다. 다들 형 스타일 좋아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방정을 부리는 사내에게, 의조는 허공으로 담배 연기를 뱉고서 한마디를 했다.


“관심 없다.”


단단하고 짧은 대답. 그러자 옆의 병사는 능글맞게 들러붙으며 웃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형 정도면—”

“말 놓네?”

“아 아닙니다! 하사님! 그래도… 진짜 연락합니다. 전역해도, 계속 연락드릴 겁니다. 저한테는 피만 안 섞였지, 형님이십니다.”


의조는 피식 웃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나가서도 잘 지내라. 술 한 잔 하자. 내가 살게.”

“감사합니다! 추웅! 쌔앵느아!”

“목소리 낮춰.”


오가던 대화 가운데에 잠시 짧은 공백이 나타났다. 둘은 서로 저마다의 시선이 마침표를 두는 곳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내만이 어딘가에 눈동자를 옮긴 채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의조의 핸드폰 케이스였다.


“저기, 하사님.”

“왜.”

“그, 사실은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또.”


의조의 대답에 사내가 지체없이 물었다.


“연애에 관심도 없다 하셨고… 솔로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해.”

“그런데… 그 핸드폰 케이스 뒤에 붙어있는 사진, 여자분… 맞지 않습니까? 누구십니까? 실은, 예전부터 궁금했었습니다.”


그의 말에 의조가 핸드폰을 뒤집었다. 핸드폰 뒷면엔 세월이 지나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붙어있었다. 의조는 손으로 그 사진을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아련하게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기억에서는 멀어진 날들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그 사람이 있었다.

너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아.”


의조에게서 소년을 닮은 웃음이 지어졌다. 자신 앞에, 사내의 궁금해하는 눈빛을 보았다. 조금 뜸을 들이다가도 그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았다.


머리 위로 온기를 품어 안은, 마치 머지않아 따뜻해진 계절을 앞서 몰래 한숨 담아온 것 같은 그런 바람이 불었다.


황혼에 물들기 시작한 사람의 얼굴이 어딘가 모르게 자랑스럽게 빛나 보였다.


그 시절보다 조금 더 자란 머리의 남자는, 어린 날의 첫사랑을 품었던 소년이 되어 말했다.


“첫사랑이고, 내 마지막 끝사랑이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