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면 돌아온다.

3화

by 전석표

“느리게 움직이면 내가 더 느려지지!”

“토끼는 원래 느려요!”

“너랑 나랑은 ‘느리다’의 기준이 다른 거니?”


토끼의 마구잡이 난동에 축사는 정신이 없었다. 내가 뒤쫓고, 여자아이는 그런 내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토끼가 축사 모퉁이에 다다르더니 멈춰 서서 귀만 쫑긋 세웠다. 여자아이가 숨을 죽이며 내게 말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 움직이면 뛸 거예요.”


나는 주춤거리며 거리를 좁히려 했다.


“저거, 조금만 더 가면….”

“안 돼요!”


그때 토끼가 앞으로 튀었고, 여자아이는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와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그 힘에 살짝 기우뚱했다.


“…왜 멈췄지?”

“몰아붙이면 더 불안해져요. 잠깐 기다리면 돌아올 거예요.”


아이의 말이 끝나자, 토끼는 정말 뒤로 살금살금 돌아오더니 여자아이의 발치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러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털을 다듬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태도를 보며 마침내 숨이 풀렸다.


“아니… 그 고생을 시켜놓고.”


여자아이가 웃었다.


“도망가는 척만 하는 아이예요. 겁이 많아서요.”


무릎에 손을 집은 채로 나는 잠자코 있다가 말했다.


“…너도 겁 많냐?”


마주 보진 않았지만, 여자아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냥, 좀 비슷해 보여서.”


그러자 약간의 뜸을 지나고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많이는 아니에요. 그래도, 가끔은요.”


그렇게 말하며, 여자아이는 토끼를 안고 우리로 돌아갔다.


“얘, 이제 내가 조금만 실수해도 도망가겠는데.”

“그럴 수도 있고요.”


내 말에 사료를 채우던 여자아이가 덧붙였다.


“곁에 오래 있으면, 천천히 익숙해질 수도 있고요.”

“사람도?”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대신 손끝만이 쉼표처럼 가라앉았다. 축사 일을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는데, 여자아이가 물었다.


“오늘 좀 힘들었나 봐요.”

“왜?”

“옷을 계속 털고 계시길래요.”


그 말에 나도 내려다봤다.


“토끼 잡겠다고 좀 뛰었으니까.”


그러자 여자아이가 말했다.


“근데 진짜는 내일이에요.”

“어?”

“토끼들 목욕시켜야 하거든요.”

“그거 힘들잖아.”

“네.”


그러나 여자아이의 입꼬리는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래도 해야죠.”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교문에서 갈라서기 전에, 나는 갑자기 떠오른 물음을 꺼냈다.


“내일 뭐 준비할 건 없지?”

“체육복이 편할 수도 있어요.”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번엔 여자아이가 내게 물었다.


“그리고… 조금만 일찍 올 수 있어요?”


내키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을 쩍 다시며, 나는 손으로만 ‘오케이’ 표시를 만들어냈다.


“네, 내일 봐요.”


그렇게 돌아서자,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나는 멈추지 않고 손만 가볍게 들어 올렸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하늘은 남색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가방을 던져두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아, 피곤해.”


하품하며 천장을 보다가 축사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불현듯 하나가 붙잡혔다. 품에 안긴 토끼와, 안도한 눈으로 쓰다듬던 여자아이의 모습이었다.


“귀엽네.”


중얼거리곤 몸을 돌렸다.


“막 성질부리다 물진 않겠지? 아, 정말.”


그날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가방에 토끼 털이 묻어 있었던 것도 모르고.




축사의 문을 여는 게 하루의 시작이었다. 짙은 건초 냄새,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토끼들의 땅을 구르는 소리가 아침 인사처럼 다가왔다.


나는 먼저 늘 물그릇을 갈았다. 하룻밤 사이에도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을 마시는 토끼를 바라보다가, 한 마디가 떠올랐다.


“대충 한다고 했었지."


그 말이 괜히 찜찜하더랬다. 토끼들에게서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제법 거슬리기도 했었다.

“어, 연서야. 잠깐 쌤 좀 보자.”

“네?”


이주하고도 이틀 전이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와 복도 한쪽에 마주 서서 그렇게 말했다.


“조만간 축사에 선배 하나 보낼 거야.”

“축사에요?”


알아듣지 못한 건 아니었으나 나는 당황해서 되묻고 말았다.


“응, 쌤이 이번에 고3 맡았는데, 좀 손봐야 할 애가 하나 있거든. 그래서 축사 일 좀 시키려고.”


낯선 사람이 온다는 말에 망설여졌지만, 선생님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덧붙였다.


“애가 좀 꼴통같아 보이긴 해도, 실은 착하고 정 많은 놈이다. 해코지할 애는 아니야. 그리고, 연서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혼자 다 하기엔 버거운 일이기도 하잖니.”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축사에선 네가 선배야. 후임처럼 써도 돼.”


그 말을 듣고 며칠이 지나 정말로 사람이 찾아왔다.


“너나 하던 대로 돌봐라.”


덩치도, 말투도 거칠었다. 그래서 솔직히, 제풀에 질려서 얼마 못할 거라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그 선배는 입으로는 구시렁대면서도 손은 쉬지 않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그 모습이, 오히려 눈에 남았다.


토끼들에게 밥을 주다 슬며시 입구를 보았다. 열어놓은 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말을 흘려보냈다.


“당분간은… 더 지켜볼까.”


입가에 걸린 긴장이 그제야 풀렸다.

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