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축사로 향했다. 오늘은 도착한 타이밍이 여자아이와 비슷했다.
“일찍 오셨네요.”
안으로 들어서니 여자아이가 막 가방을 풀고 있었다.
“일찍 오라며.”
나도 가방을 내려놓은 뒤, 여자아이는 나를 축사 옆 세면대로 데려갔다.
적당한 크기의 둥근 대야와 갈색 수건들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토끼가… 여기 들어가?”
“네. 깊게는 말고요. 머리는 물에 닿으면 안 돼요. 스트레스 받아서."
“몸만 씻기라는 거네.”
생각보다 번거롭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사이, 여자아이는 대야에 담긴 물의 온도를 손으로 확인했다.
“적당한 것 같아요.”
그러더니 때가 묻은 하얀 토끼를 안아왔다. 그런데 토끼가 나를 보곤 코를 파르르 떨어댔다. 어제 본 모습과 같았다.
“쟤 왜 나만 보면 저래?”
“익숙해져서 그런가 봐요.”
“내가?”
여자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도망가진 않잖아요.”
나는 한숨을 쉬고 대야 앞에 앉았다.
“잡고만 있으면 돼?”
“네. 미끄러지지 않게만요.”
장갑 낀 손으로 토끼를 잡는데, 녀석이 다리를 퍼덕이며 버텼다.
“야, 가만히 좀!”
허둥거리는 나를 지켜보다가 여자아이가 손을 얹었다.
“힘 빼세요. 겁 먹어요.”
“이렇게?”
그 말 따라 힘을 푸니, 정말 토끼의 움직임도 잦아들었다.
“지금이 좋아요.”
여자아이는 약을 묻혀 토끼의 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물소리만이 흘렀고, 그 사이로 손이 몇 번 부딪혔다. 어색하면서도 그다지 불편하진 않았다.
이대로면 할 만하겠다, 싶던 순간이었다. 토끼가 갑자기 몸을 털어대면서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진짜!”
그러면서 하필 입안에 비눗물이 들어갔다.
오싹한 맛에 나는 눈을 찌푸린 채 여자아이를 봤다. 아이는 앞머리가 젖어 턱선에 붙어 있었다.
“너, 머리.”
그렇게 말하며 여자아이의 앞머리를 무심하게 가리켰는데, 여자아이는 살짝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괜찮아요. 원래 물장구 치는 걸 좋아해서요.”
“토끼가 물장구도 해?”
“가끔은요.”
그 말에 싱거운 웃음이 났다.
목욕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여자아이가 수건을 펼쳐 들며 말했다.
“여기 올려주시면 제가 말릴게요."
“어어.”
그 말 따라 토끼를 수건 위에 옮기자, 손을 떠난 뒤에도 온기가 잠시 남아있었다.
나는 정성스럽게 토끼를 말리는 여자아이를 옆에서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이게 처음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혼잣말하듯 또 웅얼거렸다.
“이걸 혼자 다 했다고? 한 마리도 아니고, 꽤 오래 걸리는데.”
그 말까지 나오고 나서야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혼자 하는 게 익숙했어요.”
그 말이 가볍지 않게 남았다.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둘이서 하는 게 확실히 덜 힘들긴 하네.”
그러자 여자아이가 수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용한 한마디에 분명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축사 밖으로 햇빛이 번져왔다. 토끼를 말리던 수건에서는 어렴풋한 봄내음이 났다.
“다 마른 거 같은데, 이제 뭐 해?”
“조금만 안아주면 돼요. 해가 있어서 금방 마르거든요.”
그러면서 여자아이가 토끼를 내게로 건넸다.
“내가?”
“네. 이제는 잡아도 도망 안 가요.”
나는 괜히 긴장한 채로 토끼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곧, 긴장이 안도로 변했다.
“오… 얌전하잖아.”
“네.”
여자아이는 덧붙였다.
“따뜻한 사람한테 안겨 있으면 금방 진정해요.”
그 말에 나는 언뜻 멍해졌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아무 말 없이 토끼 귀를 다듬었다.
축사 안쪽에는 낡은 나무 의자가 하나 있었다.
일을 마친 뒤, 여자아이는 그 의자에 앉아 쉬고는 했다.
나는 대야를 정리하고 나서 물었다.
“좀 앉아도 되지?”
“네.”
말하고 나서야 혹시 불편해하려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여자아이는 내색 없이 한 편을 내주었다.
의자는 좁았다. 나까지 앉자 어깨가 몇 번씩 스쳤다. 그러면 나와 여자아이는 말없이 자세를 미세하게 고쳐 앉았다.
그대로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 같았다. 한창 귀를 두드렸던 물소리도 더는 나지 않았고 토끼들이 부시럭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러다, 자리에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토끼 목욕… 쉽지 않다.”
“그래도 잘했어요.”
“난 네가 시킨 대로 한 건데."
“그게 잘한 거예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적당한 침묵이 흐르고 나서였다.
문득 일지, 아니면 전부터 느껴왔을지도 모를 감상을 내뱉었다.
“넌 말투가 참 잔잔하다.”
머리를 긁적이며 한마디를 떼자 여자아이가 물었다.
“싫어요?”
“아니. 좋아.”
그렇게 말하며 기지개를 켜니, 여자아이는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