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아오, 진짜….”
분노를 삭이고 난 축사 안, 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태엽이 다 감긴 인형처럼. 그러나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걸 알기에 작업 장갑 한 짝을 끼우며 몸을 스르르 돌렸다.
“…그래서, 뭐 하면 되는데.”
연서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쭈그린 자세로 토끼의 물그릇을 씻고 있었다. 내 물음에 아이는 옆에 놓인 사료통을 가리켰다.
“사료? 그냥 주면 되는 거 아니야?”
“양 맞춰서 줘야 돼요. 안 그러면 애들 탈 나요.”
“참나… 토끼가 배탈도 나나.”
그러자 여자아이가 살짝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요."
그 눈빛에 나는 괜히 움찔했다. 사람 하나에 기가 죽을 줄은.
“아, 그래… 그럼, 얼만데.”
여자아이는 사료를 자기 손에 떠서 내게 보여주었다. 딱 한 줌이었다. 얼추 이 정도겠거니 하고 사료를 퍼 들자 지켜보던 여자아이가 말했다.
“…적당히.”
나무라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서 더 민망했다.
“…진짜. 왜 하필 토끼냐.”
내 중얼거림에, 여자아이가 처음으로 표정을 바꿨다.
“귀찮아요?”
“당연하지. 이딴 거 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여자아이는 사료통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 마음, 토끼들도 알아요.”
“뭐.”
“사람이 대충하려는 척하면 토끼들도 눈치채요."
“그래, 어련하시겠어요.”
겉으론 신경 안 쓰는 척했지만, 은근히 아프게 박히긴 했다. 여자아이는 토끼 쪽으로 돌아가며 덧붙였다.
“그래도 아무도 안 오면 혼자 해야 해서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와줘서 고마워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아이는 진심으로 토끼를 아낀다.
그때, 토끼 한 마리가 축사 구석에서 껑충 뛰어나와 내 운동화 코끝을 툭 건드렸다.
“…뭐야! 하지 마! 간지럽게!”
나는 성을 내며 발을 들었다 놓았다. 실은, 혹시라도 토끼가 다칠까 겁이 나서였다.
그 사이 여자아이가 내 곁으로 걸어왔고, 아이의 한 손엔 빗자루가 들려 있었다. 아이는 그걸 내게로 내밀었다.
“빗자루로 우리 주변부터 쓸어주세요. 토끼 털 날릴 수 있어서, 부드럽게.”
아이의 얼굴과 빗자루를 번갈아 보다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빗자루를 받아들었다.
“아, 예… 예.”
엉성하고, 느리고, 투덜거렸지만, 여자아이는 옆에서 내 속도에 맞춰 움직였다. 그 첫날의 시간은 지루하면서도 제 몫을 하듯 흘러갔다.
집으로 가는 골목, 나는 벌겋게 익은 하늘에게 앞으로의 막막함을 떠올려 보냈다.
“이걸 졸업 때까지 계속한다고….”
토끼 돌보기. 하찮은 한 줄이었다. 하지만 그 하찮음에, 여지껏 보내온 내 학교 생활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래 오늘 수고했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 아.”
다음 날 종례 시간, 담임은 말을 멈추더니 누군가를 지그시 바라봤다.
“한 명 빼고.”
나였다.
그냥 가지 말까 하는 충동을 어렵게 참고 축사에 왔다. 이미 와 있던 여자아이는 굳이 나를 돌아보진 않았다. 깊은 콧김을 뿜으며 나는 장갑을 꼈고, 아이의 손길에 맞춰 축사 일이 흘러갔다.
이틀, 사흘, 그렇게 한 주가 흘렀다. 인정하고 싶진 않은데, 축사 일이 제법 몸에 배어가는 것 같았다.
여자아이는 사료를 채우고, 나는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그때, 떨어진 자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조금 익숙한가 봐요.”
나는 빗자루질을 멈췄다. 좋아해야 하나 싶었다.
“뭐… 어제처럼만 하면 욕은 안 먹겠다 싶어서 하는 거지.”
말은 그러면서도 손놀림은 그러지 않았다. 대답하고서 마저 할 일을 하려는데, 대뜸 여자아이가 놀란 듯이 소리쳤다.
“깜짝이야, 뭔데?”
내 물음에, 여자아이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뻗은 손가락을 따라가자, 시야에 들어온 건 어째선지 열려 있는 토끼 우리 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상황을 파악함과 동시에 회색 토끼 한 마리가 우리 밖으로 뛰쳐나왔다.
“야, 저거 왜 나와!”
“문이 덜 닫혔나 봐요!”
탈출한 토끼가 거침없이 축사를 가로지르자, 나는 빗자루를 내버려두고 녀석에게로 달려들어야 했다. 손을 뻗어보았지만, 토끼는 쉽게 빠져나갔다.
“이리 와, 요놈아!”
이번엔 몸을 낮추어 다가가 봐도 토끼는 내가 우스운 듯이 벗어났다. 그런 내 뒤로 여자아이가 말했다.
“그러면 더 도망가요. 천천히!”
하지만 그 말과 다르게, 나는 이미 토끼를 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