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다음날, 축사에서 물통을 전부 세척하고 나서 굽었던 허리를 폈다. 바뀐 시야 안엔 토끼들과 눈을 가까이 하고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옆얼굴을 보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궁금한 거 있다.”
토끼들을 어루만지며 여자아이가 대답했다.
“어떤 게요?”
“너, 다른 일정 생기면 축사 일은 어떻게 하냐?”
물음을 받은 여자아이는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냥 뭐, 친구들과의 약속이라던가."
“그런 건 따로 없어서요.”
“아… 그러냐.”
괜히 물었나 싶어질 찰나, 여자아이가 나지막이 대답을 내놓았다.
“딱 한두 번, 갑자기 아파서 학교에 못 온 적이 있었는데요. 그럴 땐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리면 대신 부탁해 주셨어요.”
“아.”
듣는 동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는 몸이 아플 때도 토끼를 먼저 떠올렸을 거라는 생각.
“그럼… 이제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되겠네.”
“네?”
여자아이의 동공에 의아함 닮은 게 떠오른 것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젠 둘이 하는 일이잖아. 너 없을 땐 내가 보면 되고.”
그 뒤로 정적이 흐르다, 여자아이가 물었다.
“그래도… 되나요?"
“아, 잠깐… 그렇다고 악용하진 마라. 안 되겠다. 횟수 제한 둔다. 한 달에 한 번. 너무 적나? 그러면… 세 번 정도.”
그렇게 말을 마치자, 내 귀로 작게 웃음이 들렸다.
“알겠어요.” 그 아이가 말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줘서.”
나는 손을 들어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날, 축사 일을 하며 어제의 전화를 더듬었다. 왜 나는 약속을 잡지 않았을까. 왜 축사 일을 미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던 걸까.
“…하품하냐. 먼지 들어가겠다.”
결국 마땅히 구한 답은 없었다. 그저 눈앞에 토끼에게만 집중했다.
잠들기 전, 방에서 인스타그램을 켰다. 어제 연락했던 녀석의 게시물이 먼저 보였다. PC방, 볼링장, 웃고 떠드는 얼굴들.
“재밌게 놀았나 보네.”
사진이 열 장이 넘도록 있었지만, 나는 더 넘기지 않고 화면을 껐다.
“피곤해서 그런가.”
어째선지 모르게, 아쉽지는 않았다.
초록이 깊어질수록 축사도 더 더워져 갔다. 그 안에서 여자아이는 땀을 닦아낼 새도 없이 말했다.
“아이들이 요즘 더 더워 보이는 것 같아요.”
그건 기우였다. 가장 힘들어하는 건 나였다. 토끼들은 케어를 받지만, 난 나 스스로 챙겨야 한다고.
“아, 에어컨 없냐….”
그렇게 여름은 지나갔고,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쉼표를 찍었다. 방학식 날이 왔다.
“작년 같았으면 그냥 푹 잘 쉬다 오라고 했을 거 같다. 하지만, 너희도 스스로가 알듯이 지금 매우 중요한 시기에 서있지. 그만큼 너희들이 이 시간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 너희가 걸어갈 미래의 길도 달라질 거다. 걷고 싶은 길이 있다면, 나침반을 잘 활용해라. 알겠냐.”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하나둘 나가려는 순간, 담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강민재.”
몸을 돌리자 담임은 다른 말 없이 손을 까딱거렸다.
“무슨 말씀 하시려는 건데요.”
그렇게 대뜸 나를 교무실까지 끌고 오길래 또 뭔가 싶어 미간을 구기고 있는데, 그런 내 심기 따위야 신경도 안 쓰던 담임은 얼마 안 가 내가 아닌 뒤편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댔다. 돌아보니 거기엔 여자아이가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도 이내, 두 사람이 같이 나란히 서서야 담임은 우릴 부른 이유를 알려주었다.
“네가 1학기 동안 축사 일한 보상이다. 둘이 보고 와라.”
그렇게 말하며 내게로 뻗은 건 영화 티켓 두 장이었다.
얼른 받으라는 식으로 티켓을 나풀나풀 흔드는 담임에게, 나는 옆에 있는 여자아이를 힐끗 보다가 말했다.
“아니, 저, 그런 거 아닌데요.”
여자아이도 조심스레 입을 뗐다.
“안 봐도 돼요. 선배 불편하면.”
그러자 담임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뭐, 그건 너네 알아서 하고.”
그러면서 내 가슴팍에 영화 티켓을 팍, 하고 안겼고, 나는 얼떨결에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에 넣으려는 손이 약간 헛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