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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잡남 Oct 22. 2018

#6. [단속사회]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위기 1부

개인 스스로를 남과 단절하지만 항상 접속하는 아이러니

  단속사회란 사람의 성장이 불가능한 사회다. 낯설고 모르는 것과 부딪치고 만나며 경험을 확장하고 갱신하고 통합하며 자신의 삶의 서사적 주체가 되려는 그런 성장은 불가능하다. 그 대신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면 미친 듯이 자기를 소진해가고 그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널브러지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다.


  이에 대한 내용은 실제적으로 삶을 살면서 꽤나 많이 경험을 했었다. 우리는 친한 사람들끼리 어울려 다니는 '끼리끼리'의 문화가 굉장히 강력하다.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느끼는 낯섬은 위험하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정도의 선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낯선것을 도전하거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 하는 청춘들이 적고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대가 되다 보니 성장이 더 이상 불가능한 세대가 된 것이 문제다. 


  아무도 말걸지 않는 사회,
  서로 둥글게 모여 앉기는 했지만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에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나는 교회에서 흔하게 보아왔다. 아니 교회 뿐만 아니라 회사도 마찬가지고 어떤 모임이든지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원탁에 둥글게 앉거나 의자를 둥글게 놓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공동체나 조직에 관한 지시사항이 전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고 이의를 제기할 경우 공동체 눈 밖에 나는 것을 경험했다. 둥글게 모여 이야기를 나눌 것 처럼 보이지만 굉장히 가공된 이야기가 오가며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사회가 작은 곳에서부터 이루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둥글게 모여 앉아 말을 나누다라는 말자체에
이미 공동체가 폐쇄적이라는 뜻이 숨어 있다. 


  나는 둥글게 모여 앉는 다는 의미에 대해 알고 있지 못했었다. 그러나 때때로 둥글게 모여 있는 그룹에 내가 끼어 들어가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었다. 왠지 모를 벽이 생기는 기분이 들었고 왠지 모를 거부감이 있었다. 왜 거부감이 드는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생각을 가졌었다. 이에 대한 내용을 책에서 발췌해 낼 수 있었다.


둥글게 모여 앉았을 때 만들어지는 원이야말로 폐쇄적이지 않은가. 원 안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모두가 안을, 즉 서로를 바라본다. 원 밖에 있는 사람은 배제된다.


  둥글게 모여 앉는 것이 나는 자연스러운 그룹형성이라고 착각했었다. 그런데 이것은 지극히 폐쇄적인 모임이 되고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하는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외부와는 어떤 말도 나누지 않겠다는 사인인 것이며 폐쇄적인 모임이 되는 순간 의견을 제시할 수 없는 그룹으로 성장하게 된다.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모두가 같은 발언권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발언을 제기할 수 있는 그룹장이 생겨난다. 주도적인 발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룹 안에서 권력이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그 사람을 다음 역에서 데리고 나가 등을 두드려주는 경우는 흔치 않다.



  만일 내가 지하철역안에서 토를 했다면 그날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게 된다. '지하철 7호선 구토남' 정말 간혹 누군가는 안타까움에 지하철역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나 사람들 부른다. 그렇게라도 돕는 손길이 있다면 다행이지만 사실상 유투브에 먼저 일파만파 퍼질 확률이 훨씬 높다. 등 두드려 줄만큼 인정이 많지 않은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책에서 리처드 베넷은 이 사회를 지배하는 두가지 원리로
가시성과 사회적 고립을 꼽는다. 사무실에서 벽을 없애버리는 것처럼
누구든 서로를 볼 수 있는 가시성이 강화될수록 친밀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에 의한 서로의 감시만 증가한다.


  사무실에 벽이 없다는 것이 서로 개방적으로 소통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앞서서 말한 것처럼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은 상황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벽을 없애 버린다는 의미는 서로 보게 감시하게끔 만드는 구조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발생되는 현상은 다음과 같다.


이 상태에서 개인은 침묵만이 자신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알게 되고 침묵하는 것을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단절하여 고립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통된 감정은 바로 공포감이다.


  그래서일까... 모임 중에도 보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절대로 한마디도 하지 않는 친구들도 생각보다 많았고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는 듯한 표정을 읽은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들이 당시에 느꼈던 공포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목숨 걸고 추구하는 것은 생존과 안전이다. 사냥꾼이 될 수 없으면 최소한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나타내는 가장 무시무시한 한 마디라고 생각한다. 이게 거짓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나타나고 있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이라는 게 너무나 공포스러운 것이다. 최소한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침묵을 택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스스로 지극히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예 사회와의 단절을 선택한 극단적인 삶의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강남 8학군, 목동, 분당과 같은 지역은 '빗장건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그네들만의 문화를 형성하여 군건한 성벽을 쌓는 것이다. 아이들 조차도 서로 다른 소득구조의 아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빗장을 걸어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룹을 형성했다.


  책에서는 이렇듯 타자와의 만남이 사라지고 개별화, 동질화된 세계에서는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경험은 낯선것과 동질적인 것 안에서 무한히 반복되니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더 무서운 점은 누군가에게 나의 고민을 말할 수 없는 사회로 귀결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나도 겪었던 일이다. 중학교 시절 몇몇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었다. 맞기도 하고 심각한 장난질에 놀아났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선생님께 말씀드렸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경험했었다. 그 뒤로 내가 깨달았던 것은 '선생님에게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고등학교를 지나고 대학교를 통해 회복이 되어 나에게 더 큰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현재 대다수의 청소년들의 경우 선생님에게 문제를 토로하지만 정작 선생님들이 난감해하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표정을 감추는 사회를 택하는 것이다. 표정을 감추고 예의바름만 보인다면 적어도 사냥감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갖고 살게 되는 것이다.


   책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로 3가지의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과 타자와 제도에 대한 신뢰가 그것들이다. 그래서 자신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밀한 사람들로만 인간관계를 채우려하게 되고 최대한 세상과의 접속을 피하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오랫동안 시간을 거쳐 형성되는데 우리의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를 단기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상호헌신성'이 사라졌고 이는 생산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소비하는 인간관계로 전락해버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의 공간에서는 자신을 감추는데 온라인상에서는 나의 모든 사생활과 어려움과 괴로움을 토로하거나 모든 것을 공개한다는 것이다. 사적인 부분들이 그저 하나의 '소비하는 스낵'처럼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공중파에서 내보내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잘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을 촬영하여 보여주거나 아이들과의 추억을 남에게 TV로 공유한다. 친구들을 만나는 만남 조차도 구경거리가 되고 연인들끼리 공유해야하는 모든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공유된다. 사람들의 만남과 내 삶의 사생활이 그저 쿠키를 씹는 것과 동일한 가치로 하락한 것이다. 




  낯선 것을 가장 많이 경험하게 되는 순간은 배낭만 들쳐메고 산으로 들로 여행을 갈 때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어디로 길을 가야할 지 몰라 물어보게 되기도 하고 낯선 이들에게 다가가게 된다. 책에서는 저자가 몽골을 여행할 때 겪었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저자는 기름이 없어 몽골초원에서 드라이버와 길을 잃었고 앞이 깜깜하여 굉장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가야할 길이 35km나 남은 상황이어서 더욱 아찔했단다. 그러다 다행히 오던 트레일러의 도움으로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앞뒤가 보이지도 않고 사방팔방이 보이지 않으니 길이면서도 길이아닌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몽골의 게르는 문이 항상 열려 있다고 한다. '낯선이'가 분명히 위협이기도 하지만 길을 가다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당연히 도움을 얻고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그 낯섬이 공포감인 것도 사실이나 게르를 오픈하는 이도 언젠가는 여행자가 되어 길을 떠나야하므로 기꺼이 도움을 건넨다는 것이다. 한 때 몽골이 전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에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낯선것을 접하고 '말'을 하고 '말'을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기획된 친밀성'이 강화된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우리는 지극히 개별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옛적부터 돈을 벌어오는 존재였고 그럼으로 인해 가정 안에서 주도권과 권력이 있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항상 가정 안에서 감정노동을 해야 했고 아버지라는 존재는 돌봄을 원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여성들이 취업과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더욱 부각되면서 역전이 되었다. 그 동안 여성분들이 고생하던 것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가부장적인 아버지들이 대부분 은퇴를 하게 됐다. 돈을 벌어야 하니 프랜차이즈를 차렸다가 망해서 복구불능한 상태가 되어버린 이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집이 아닌 방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살다보니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어진 집도 허다하다. 아버지가 집을 3주를 나가 있어도 가족 구성원 중 그누구도 눈치를 채지 못하게 되는 경우들이 늘어난 것이다.  


  어머니가 실제적으로 경제적인 역할과 가정의 돌봄까지 함께 하다보니 어머니도 쉼을 갖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서로의 단절과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강요받은 우리의 가정안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고독할 시간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방'으로 이루어진 방의 전성시대다. 'PC방', '모텔방', '플스방', '노래방' 등, 모든 것이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이라는 것은 고독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냥 거쳐가는 공간인 것일 뿐이다. 무엇인가를 즐길 수 있는 최적화된 공간일뿐이다. 기능성만이 강화된 방의 천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집이 아니라 '아파트'에 미쳐 있는 것이다. 온통 방으로 이루어진 고공간임에도 많은이들은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 집이라는 것은 담장이 있어 구분지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아파트는 문만 존재할 뿐 담장이 없다. 방과 방의 연결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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