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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잡남 Oct 09. 2018

"내가 경험한 여섯번째 직업"

feat. 생산관리 사무원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한 동안 고민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앞으로 뭘하고 살아야 하나?


  그런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을 안할 수가 없었다. 당시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는데 어찌해야 하나 고민이 됐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때 꼭 해볼껄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들때가 자주 있다. 그렇지만 나는 돈 앞에 약했다.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교수님들마다 찾아서 일자리를 묻고 얻고자 했었다. 컨텐츠 생산하는 회사는 자리가 다 차서 갈 수 없었고 본래 전공과 관련된 교수님을 찾아뵈서 소개를 받았다.


  오창에 있는 과학단지에 취업이 됐다. 여기에는 화학관련 회사와 제조관련된 업체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가 찾아간 회사는 삼성 2차밴드회사로 핸드폰 액정관련된 회사였다. 면접이 확정된 날 사무실에서 상무님을 만나뵙게 됐다. 일단 소개 받은 부서는 장비부서였고 장비과장님이 들어 오셨다. "우리는 출퇴근이 좀 탄력적이다. 그것도 좀 많이. 그래서 할 수 있겠냐?" 솔직히 야근이 싫었고 밤샘일도 싫었다. "아뇨... 저는 주말에 가야할 곳이 있어서 힘듭니다."라고 했다. "하아... 그럼 우리 부서랑은 좀 안맞겠는데..."라고 하셨고 생산부서 상무님을 소개 시켜 주겠다고 밖을 나가셨다.


  잠시 후 생산부 상무님이 들어 오셨고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셨다. 어떤 것이 장점이냐 회사 들어올 때 분위기가 어땠냐 등등 다양한 질문들을 나에게 여쭈어 보셨다. 그에 맞게 대답했는데 "혹시 생산관리라는 직군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라고 물으셨다. 난 태어나서 처음듣는 단어였다. 굉장히 생소했다. 무엇을 하는 부서인지 감도 안잡혔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버버하면서 어찌됐든 대답을 했다. 그렇게 그날의 면접은 마쳤고 집으로 돌아가 면접 결과를 기다렸다. 3일이 지났고 그렇게 내생에 공식적인 회사에서 근무생활이 시작됐다. 그리고 정확히 3년간 고립된 생활을 견뎌야 했다.


  생산관리부서에 배정받고 처음으로 했던 일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회사 내에 있는 물건의 개수가 몇 개인지 파악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그리고 납품하는 수량을 정확히 기재하고 여러 부서에게 그에 대한 리포트를 제출해야 했다. 지금은 덤벙거림이 좀 덜하지만 당시에는 조금 버벅거리고 덤벙거렸다. 그로 인해 수개월간 영업부에 계시던 차장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잔소리도 들었다. 너무나 싫었고 틀리지 않기 위해 몇 번씩 확인하는 습관을 들이기 시작했었다. 그 이후로 숫자를 확인한 일이 있을 경우 3번 이상은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삼성의 저가폰의 판매량이 늘면서 자연스레 회사의 물량이 늘었다. 회사가 급성장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몇몇 과장님들과 직원들이 충원이 되었다. 본격적으로 새로 나의 상사로 자리잡으셨던 과장님과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상사운이 나에게 따랐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나에게 인간답게 그리고 때로는 형답게 때로는 멘토로 대해주신분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일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되거나 힘이 들거나 하지 않았다. 나에게 명확히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이드를 잡아 주셨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깔끔했다. 제조업은 원자재가 들어오면서 일이 시작이 된다. 원자재를 과정에 따라 처리를 하는데 공정마다 공간이 있었다. 생산관리 부서에서 일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몇개가 어느 공정에 돌아다니고 있는가 였다. 하다못해 샘플도 어디에 몇개가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공정내에 남아 있는 수량이 곧 회사의 자산이었다. 그리고 중간 처리업체였기에 물량에 대한 재고실사를 한달에 한번 년말에 한번씩 총 12번을 진행했었다. 몇개가 손실이 되었는지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24시간씩 딱 하루를 일했었다. 1달에 한 번은 밤을 샜지만 그 외의 주말에 출근한 적이 없었고 평일에도 칼퇴근이 가능했다. 기숙사가 회사와 그다지 멀지 않아서 출퇴근 시간도 아낄 수 있었다. 물론 친구들이 그 곳에 없었기에 자연스레 고립됐었다. 회사의 공정의 물량이 곧 회사 자산이었기에 관리하는 부분에 있어서 가장 많은 시간과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다 보니  내가 데리고 일해야 하는 비정규직 직원들도 6명이나 생겼다. 회사에 물량이 미친듯이 쏟아져서 별도로 관리 해야 하는 불량품들이 늘었다. 이를 전담하는 부서아닌 부서가 생겼고 주간, 야간조간에 분열을 막고 연합을 도모해야 했었다. 그러나 생각한 것처럼 쉽지가 않았다. 서로 다져지지 못한 모난 부분들이 서로를 찔렀고 많은 이들이 퇴사를 하고 많은 이들이 또 입사를 했다. 엉망진창으로 일이 엉킨적도 있었고 나의 부족으로 인해 문제가 조금씩 발생하기도 했었다. 이 때 조직관리라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사서 내편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배울 수 있는 시기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생산관리 사무원은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상대편을 내편으로 만들 것인가?


  

라고 말이다. 정확하게 수량을 관리하기 위해 기법을 도입하고 도요타식의 라인도 그려보고 여러가지 기술들을 도입했었다. 관리방법에 대한 공부도 했었고 어떻게든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고자 노력했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이 일하는 것이었고 사람을 통해 모든 것이 이루어 졌다. 사람이라는 존재의 끈이 이어지고 그 끈을 두텁게 만들어서 더 많은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생산관리 사무원이 가져야 할 능력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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