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션대리 Aug 11. 2022

월급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밥줄이 끊긴다는 게 이런 거구나.

션대리님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퇴근 시간, 나의 상사이자 인사부장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방에 들어가니 책상 위에 A4 용지 한 뭉텅이가 놓여 있었다. 상사는 말없이 내 눈앞에서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했다.

“타 브랜드 홍보는 왜 하신 거죠?” “겸업금지 조항 어긴 거 인정하세요?”

종이에는 내 SNS 활동들을 하나하나 캡처한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상사의 확인사살은 한마디 한마디 푹푹 가슴에 명중해 들어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내 입으로 퇴사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권고사직의 빌드업이었던 것 같다. 졸지에 당장 다음 달부터 수입이 ‘0’이 되었다. 입사한 지 6개월 째여서 퇴직금도 받을 수 없었다. SNS 활동으로 부수입이 있긴 했지만 서울 생활을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매달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이 100만 원이었다. 차 할부금, 전세 대출, 생활비는 어떻게 해결하지? 공포감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루 평균 수면 시간 3시간.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고 눈도 떨렸다. 사람들이 괜찮냐고 물으면 “마그네슘이 부족한가 봐” 너스레를 떨었지만 그건 분명히 권고사직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내가 잡은 건 썩은 동아줄이었다.


‘당장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사람은 지금의 회사로 이직을 도와준 헤드헌터였다. 아모레에서 생로랑이라는 기회를 열어주었으니, 내가 옮길 수 있는 또 다른 회사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당장 헤드헌터에게 연락해 티타임을 가졌다. 사정이 이렇게 돼서 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혹시 나에게 맞는 자리가 있다면 연락 달라고 부탁을 했다. 얼마나 성심성의껏 내 얘기를 잘 들어주던지, 심지어 헤드헌터 일은 어떤지까지 물어봤다. 그때의 나는 영업직으로 직무 전환도 할 수 있다는 심정이었다.

다음날 회사에 갔더니 분위기가 이상했다. 친한 대리가 나를 따로 불러 조심스럽게 해 준 얘기로는, 알고 보니 헤드헌터가 인사부장에게 연락해 내가 한 얘기를 전한 것 같다고 했다. 헤드헌터에게 돈을 주는 곳은 생로랑이지 내가 아니니까 상식적으로 헤드헌터는 철저히 생로랑 편이었을 텐데. 물에 빠진 사람처럼 썩은 동아줄인 줄 모르고 눈앞에 보이는 기회를 보이는 대로 붙잡았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취업 사이트에 들어가 이력서도 닥치는 대로 넣었다. 어디 지원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니 당연 결과는 대부분 서류 탈락이었다. 그중 딱 한 곳, 반스 코리아에서 면접 보자는 연락이 왔다. 반스 코리아의 인사부장과 화상으로 면접을 봤는데 면접을 시작하자마자 서로 직감했다. ‘이 면접은 시간 낭비다’ 당시 나는 신발 필드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로 생로랑에서의 경험으로만 면접에 임했고 기본적인 질문에 제대로 답도 하지 못했다. 면접을 보는 동안 현타가 왔다. 나도 별의별 짓을 다 하고 있구나. 당연히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대학생 때 취업 준비 기간이 짧았기에 처음 겪어보는 시행착오였고 그래서 더욱 타격이 컸다.


내 수중에 남은 돈, 딱 50만 원

 오전 8시, 사람들은 만원 지하철을 타고 돈을 벌러 가는데 나는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나 자신이 세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가장 무쓸모 한 존재로 느껴졌다. 대학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해 쭉 월급을 받고 살다가 당장 월급이 사라지니 형용할 수 없는 막막함과 공포감, 좌절감이 밀려왔다.

그때가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을 정도로 가장 (심적으로) 찌질한 시기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다니던 크로스핏에서 친해진 동갑내기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청첩장을 주는데, 당장 머릿속에 ‘축하한다'는 말보다 축의금이 너무 아깝단 생각부터 들었다.

‘내가 거지인데 남을 축하한다고? 다음 달부터 당장 집세도 못 내고 밥값도 없는데?’

그 와중에 체면을 차린다고 결혼식에 또 굳이 갔다. 모두들 환하게 웃으며 축하를 주고받는 장소에서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축의금도 내놓고선 답례품도 안 받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오는데(버스비 아끼겠다고 또 굳이 걸어갔다) 스스로가 그렇게 찌질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결국 친누나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를 했다. 살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나 정말 미안한데… 다음 달 생활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백만 원만 빌려주라”.


갑작스러운 동생의 요청에 누나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갑자기 돈 빌려달라니 무슨 소리냐, 상황을 찬찬히 설명해보라는 누나의 말에 도리어 화를 냈다. 동생한테 그깟 돈 백만 원도 못 빌려주냐고. 쪽팔려서 눈물이 났다. 누나한테 돈 빌려달라 해놓고 화내는 꼴이라니. 6평짜리 오피스텔 책상에 앉아 누나에게 전화하다 말고 엉엉 울었던 날도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달의 공백기후 지인의 회사에 취업을 했고, 누나에게 울면서 빌린 돈도 바로 갚을 수 있게 됐다. 내가 아모레를 퇴사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모레에서 모셨던 팀장님이 스타트업을 시작하셨고, 나를 좋게 봐주셔서 함께 일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주셨다.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했기에 월급은 다소 줄었지만 적어도 월급이 사라진 공백은 메울 수 있었다.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의지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1년 뒤 회사를 나와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월급이 사라졌던, 인생 가장 찌질하고 힘들었던 때로부터 2년 반이 지났다. 지금의 프리랜서 생활은 예전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수입이 꺾일 수 있고 또다시 아예 수입이 없는 상황이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뭐든 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뷰티 크리에이터, 대행사에 다니는 지인도 만나보고 스타트업 다니는 친구들 등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고 그 결과 돈 벌 길이 나타났다. 사람 일은 어.떻.게.든 풀린다는 걸 경험으로 알게 됐다.


직장인에게 월급이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건 공포 그 자체다. 혹시 같은 일을 겪고 있는 분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내 인생 가장 어두웠던 시기를 지나고 보니 살아날 구멍은 있더라고. 지금의 시행착오가 미래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니 무엇이든 부딪혀보라고.


멍하게만 있지 않으면 된다.


공감되는 부분을 캡쳐하여 인스타 스토리에 올려주세요.

@shawn_issure 태그해 주시면 리그램하러 갑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