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선 Jun 16. 2024

왜?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사랑의 기술은 배우려 하지 않는가.

"남들은 친정에 가면 신이 난다는데.. 난 왜 친정이 부담스러울까?"

운전 중인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친정 가는 마음이 답답하다고.

왜 그런 걸까?

도대체 왜?


최근에 읽은 책 '가족공부'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가족관계로 고민하거나 더 나은 관계를 원한다면 도움이 될 내용이 많다.


가족공부 (최광현지음. EBS 북 발행)


의 내용처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타인'이 가족인 것 같다.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가장 멀리 느껴지기도 하고

쉽고 편할 것 같지만 불편하고 어려운 존재.


가족만이 알고 있는 내밀한 갈등과 상처들.

쉽게 드러내지도 못하고 평생을 묻고 갈 수 도 있는

그 상처가 나는 물론 내 자식에게 까지 대물림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마저 든다.


(심리학) 책을 통해 지난 상처를 돌아보고 치유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내 마음 깊은 곳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구나~'

친정에 가는 것이 부담스럽고 유쾌하지 않았던 이유가 내 상처에 있었다.


상처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상처는 주고받으며 자란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를 오가며.

그 상처가 때로는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내가 싫어했던 부모님의 모습(말투, 행동)이 튀어나와서 당황스러웠던 경험이다.

"이건 뭐지? 내가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모습인데.. 

 왜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걸까?" 

싫어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닮고 있었다.

아차 싶었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모습을 보고 나의 아이들도 닮을까 봐.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셨고 주정(?)을 부리셨다. 

사업 실패와 그로 인한 생활고, 암담한 미래... 그런 요인들이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아버지가 술이 취한 날은 온 가족이 비상이었다. 

아버지의 술 취한 목소리가 미치도록 싫었다.

부모님의 싸우는 모습을 봐야 하는 그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허구한 날 반복되는 그 일이 지긋지긋했고

그럴 때마다 집을 뛰쳐나가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아버지의 술주정이 끝날 무렵에야 집으로 들어갔다. 

술 냄새를 풍기며 곯아떨어진 아버지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야(두 살 아래 여동생)는 너희 아버지 술 취해서 그럴 때 내 옆에서 달래고 했는데

 니(나)는 집 나가서 안 들어왔지?"

지난 상처를 엄마가 끄집어냈다.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듯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엄마는 알고 있나? 

 오죽하면 내가 술 안 먹는 남자랑 결혼했겠나?"

부모님과 같은 결혼생활을 할 바엔 차라리 결혼 안 하겠다고 했다.

상처를 받은 만큼 나 역시 모진 말로 부모님께 상처를 주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경험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내 삶에 흔적을 남긴다.


다짐대로 술 안 먹는(아니 아주 조금만 먹는, 술주정은 1도 없는) 남자와 결혼을 했고

지금은 내 인생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가시 돋친 고슴도치 같았던 나를 이만큼 부드럽고 사랑도 받고 줄 줄도 아는 여자로 만든 것이 남편이다.

그래서 고맙고 살아갈수록 더 괞챦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족

(가족공부)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의 변화는 나의 변화에서 출발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가족은 변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을 바꾸려고 하는 노력과 더불어 내가 상대방에게 취했던
자세를 바꾸는 것이 필요합니다.'

맞는 말이다.

같은 문제로 십 년 넘게 도돌이표로 부부싸움을 하는 가족(여동생 부부)이 있다. 

지치지도 않는지. 이쯤 되면 포기할 만도 한데..  

싸움을 그칠 기색이 안 보인다. 

'내가 변하지 않고 상대가 변하기만 바라고 상대를 바꾸려고만 하는 태도

 내가 옳다. 그러니 네가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을 서로에게 반복하는 것이 문제였다.

서로가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있으니 해결점을 찾을 수 있겠는가?

가족들이 나서서 중재를 해줬는데..  앞으로의 변화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고 선택이다.


'가족 안에는 어쩌면 영원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것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아버지(어머니) 인생에 어떤 부분이 있었는지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 대물림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첫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공감 가는 말이다.

이제는 부모님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보려고 한다. 

부모님 인생에 어떤 부분이 있었는지를 보면서 한 남자 한 여자로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부모님은 내게 상처를 준 가해자이고 나는 피해자라고만 생각했고 

부모님은 내게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우겼지만

부모님도 나의 말에 상처를 받은 피해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역시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상처를 준 가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함께.

대물림의 악순환을 끊을 첫걸음을 시작해 보려 한다.


"아들, 아들은 어렸을 때 엄마에게 상처받은 거 있어? 

 혹시 상처가 있었으면 풀고 잊어줘. 그때는 엄마도 잘 몰라서 그런 거니까."

"... ,  별로 기억나는 거 없는데... " (큰 아들의 대답이다.)

"엄청 많지? 그 상처가 곪아있는데... " (휴가 나온 작은 아들의 대답이다. 장난인지 진심인지?)

아들들 마음에 왜 상처가 없었겠나? 부모로서 부족했음을 인정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나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여유가 없었고 쫓기듯 살았고 어쩌다 보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부모의 권위를 내세워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따라오기를 바랐었고

때로는 모진 말도, 사랑을 가장한 체벌도 했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은 없음을 알고는 그 후 일체 체벌은 하지 않았다. 맹세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말을 늘 명심하면서.)


"미안했다. 아들들아. 부모로서 너희들에게 상처 준 말이나 행동을 했다면 사과할게.

 미숙하고 부족한 엄마였음을 용서하고 이해해 줘.

 앞으로는 안 그럴게.. "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왜 사랑의 기술을 도무지 배우려 하지 않는가?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사랑의 기술은 남녀 간의 관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가족관계에서도 꼭 필요한 기술이다.


사랑에 실패하면서도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랑도 기술이다. 경험하고 공부하고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사랑의 기술을 배우려 했고(지금도 배우고 있고)

그 덕분에 지금도 행복하고 앞으로는 더 행복할 것 같다.


공부하자. 사랑의 기술을, 그리고 가족공부도.

공부해서 남 주는 것 아니니까.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다면..




인용글 : 가족공부 책 내용 중에서

사진출처 : 픽사베이


지금 행복하자.

happy now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