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음을 쉽게 여는 사람이 아니다. 아주 소수에게는 활짝 열기도 하지만, 그건 상대가 얼마나 노력했느냐와는 상관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선택이다. 연애와도 비슷하다. 내가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나와 비슷한 마음일 거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그리고 가까워진다는 건, 언젠가 헤어짐이 동반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심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는 자연스레 기대를 낳는다. 내가 상대를 신경 쓰는 만큼, 상대도 나를 신경 써주길 바라게 된다. 그러나 그 기대의 높낮이가 다를 때, 관계는 흔들리고 결국엔 깨어진다. 어느 순간, 영원히 보지 않게 되는 사이라니.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손절’ 일 것이다.
어릴 때는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일이 쉬웠다. 같은 또래는 관심사가 비슷했고, 나보다 나이 많은 이들은 내가 어리기 때문에 내 말과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한 조직에서 ‘중간 정도 나이’가 되자 모든 게 달라졌다. 이제는 누가 나와 비슷한 연배인지조차 쉽게 알 수 없고, 대부분의 또래는 육아라는 과업을 치르고 있다. 그 한가운데서 나는 빠져 있다. 삶의 큰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 내 고민은 하찮게만 느껴진다. 그러니 또래와 친구가 된다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더 어린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또 다른 고민이다. 내가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해도, 상대가 그렇게 받아들일지 걱정이 앞선다. 괜한 오지랖처럼 보일까 싶어 주춤거리게 된다. 때론 나이가 많아 생긴 여유로 올라간 월급으로, 그들의 시간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남편은 나를 만나 처음으로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알게 됐다. 40대 중반의 그도, 회사에서 자신이 가장 많은 아이돌 지식을 갖고 있다는 걸 숨긴다. 후배들이 “그게 누구예요?”라고 묻는 말에 “그것도 몰라?” 하고 웃어 넘기기엔, 그 나이의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선배들이 편하다. 내가 아직 뭘 몰라도 자연스럽게 받아주고, 조금은 어린 척을 해도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 때문이다. "좋은 나이야"라고 말해주는 선배들이 있어, 그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들과 밥을 먹거나 시간을 보내려면, 내 이야기를 어디까지 열 수 있을지를 따져봐야 한다. 사실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이유를 늘어놓다 보면, 결국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어버린다. 나와 같은 이슈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 내가 가감 없이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사람. 남편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그래서 남편이 출장을 가면 조금 당황스럽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호수(고양이)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동생에게 전화할 수도 있지만, 나는 전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쯤 되니 나 자신이 꽤 비사교적인 사람처럼 느껴진다.)
얼마 전, 남편이 일주일간 국외 출장을 다녀왔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적립해 두었다. ‘이건 재밌어하겠지’, ‘오면 꼭 말해줘야지’ 하며.
누군가는 남편이 출장을 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유롭지 않냐고. 하지만 내게는, 남편이 있을 때의 내가 없을 때보다 훨씬 자유롭다.
우리는 서로를 보며 이야기한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는 친구가 없어도, 친구를 만나지 않아도 결핍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네가 사라지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렵다. 이 삶의 무게를 누구와 함께 짊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한편으로는 생각하게 된다. 남편이 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덜 갖는 건 아닐까. 관계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어쩌면 나는 굳이 다른 사람에게 그 에너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무의식 속 안도에 기대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뒤로는, 예전처럼 무심히 넘겼던 사람들의 대화에도 조금씩 귀를 기울여본다.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며 우리 사이의 간격을 가늠해 본다.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에 누군가가 슬쩍 손을 얹어줄 수 있다면, 그 손길만으로도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동기가 어떻든, 타인에 대한 작은 관심과 애정이 의식적인 행동으로도 시작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