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호 Oct 11. 2017

33

B가 준 2파운드는 약 열흘 정도 이어졌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건 거리의 지독한 인색함을 익히고 하루에 제대로 된 한 끼도 터무니없는 사치로 여기는 패디 덕이었다. 그에게 있어, 음식은 순전히 빵과 마가린만 밖에 없었다-끊임없는 홍차와 빵 두 조각, 이것으로 한두 시간은 배고픔을 속일 수 있다. 패디는 반 크라운 정도로 하루 동안 어떻게 살고, 먹고, 피고, 자는지, 모든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패디는 가끔씩 '빈차 봐주기'로 몇 실링을 벌었는데, 불법이었기에,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얼마 정도는 벌 수 있었고 우리 돈을 조금이라도 아낄 수게 해 주었다. 


어느 날 아침에는 샌드위치 만드는 일을 얻어 보려 했었다. 사무실들이 몰려있는 뒷골목으로 다섯 시에 갔으나, 이미 30에서 40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남은 일자리가 없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아쉽지는 않았는데, 샌드위치 만드는 사람들의 일이 부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루 열 시간을 일하고 3실링을 받는다-쉽지 않은 작업이다, 특히 바람이 부는 날씨에는 더욱 그렇다, 그리고 숨어서 쉴 수도 없는 게, 감독관이 수시로 찾아와 사람들이 정확한 순간에 맞춰 일 하는지 감시를 한다. 추가적인 문제는, 그들이 일용직이라는 점이다, 가끔 3일을 고용하기도 하지만, 절대 일주일 단위로는 고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매일 아침 줄을 서야만 한다. 일 할 준비가 된 넘쳐나는 실직자들은 이들이 더 나은 처우를 위해 싸울 수 없도록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사람들이 탐내는 일은, 같은 급여를 받으며, 전단지를 나눠주는 일이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을 봤을 때 한 장 받아주는 것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 전단지를 모두 나눠주어야만 할당된 일이 끝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우리는 싸구려 여인숙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지저분하고, 참담하게 지루하며 정말 별 볼 일없는 삶 말이다. 며칠은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그저 지하실 주방에 앉아, 어제 신문이나, 누군가 구해 온, 유니온 잭 과월호를 읽었다. 그 당시 비가 상당히 많이 와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몸에서는 열기가 뿜어져 나왔고, 주방은 추악한 악취로 진동을 했다. 유일한 즐거움은 주기적으로 먹는 차 한잔과 빵 두 조각이 전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런던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다-최소 몇 천은 되지 않을까 한다. 패디는, 실제로 지난 2년간 알고 있던 그 어떤 삶보다 최고의 삶을 살던 중이었다. 페디의 부랑자 생활 휴식기는, 어찌 됐든 몇 실링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시기다, 항상 이렇게 흘러 왔다. 떠돌이 생활 자체가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다. 그의 훌쩍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니-패디는 먹을 때 아니면 언제나 훌쩍이고 있었다-실직이 그에게는 얼마나 큰 고문인지 알게 되었다. 실직자들이 그들 급여에 대해서만 걱정한다고 생각하는 건 사람들의 오산이다. 반대로, 문맹자들은, 일하는 습관이 뼈 깊숙이 박혀있기에, 돈 보다 한참은 더 일자리를 원한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강제로 부여된 빈둥거림을 참고 견뎌 낼 수 있다, 빈둥거림은 빈곤이 가진 최고 악이다. 하지만 패디 같은 사람에게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 비참한 실직상태란 사슬에 묶인 개와 같은 거다. 이래서 '몰락한 사람들'이 다른 누구보다 동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허튼소리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동정받아야 할 사람들은 시작부터 바닥이었고, 아무 대책 없이 백지상태로 빈곤을 직면하는 사람들이다. 


따분함의 서리가, 내 마음속에 약간 내려앉았지만, 보조와 대화할 때만은 예외였다. 한 번은 빈민가 순회자들에게 여인숙이 침공받은 적이 있었다. 패디와 나는 밖에 있다가, 오후에 돌아왔는데, 밑층에서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는 밑으로 내려갔다, 반질반질한 옷에, 부유해 보이는 세 사람이 종교행사를 열고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의 신부 선생은 행사용 외투를 입었고, 여자는 자그마한 이동용 오르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약해 보이는 청년은 십자가상을 만지작거렸다. 그들은 초대장도 없이 밀고 들어와 종교행사를 열고 있었다. 


숙박객들이 이 침공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는 건 꽤나 즐거웠다. 그들은 이 빈민굴 구경꾼들에게 그 어떠한 무례도 저지르지 않았다. 전적으로 무시만 했다. 주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합의에 의해-백여 명 정도가 있었다-이 빈민굴 구경꾼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 행동했다. 이 들은 참을성 있게 서서 노래를 부르며 함께 부르기를 권했다, 그럼에도 집게벌레보다 못 한 취급을 받으며, 어떤 주목도 얻지 못했다. 종교행사용 외투를 입은 남자는 설법을 전파하려 했지만, 단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는 시끄러운 노랫소리, 욕설, 그리고 냄비들이 달카닥 거리는 소리에 묻혔다. 사람들은 오르간 바로 옆에 앉아 밥을 먹고 카드놀이를 즐기며, 평온히 그들을 무시했다. 이윽고 빈민굴 구경꾼들은 포기했고 자리를 비웠다, 어찌 됐든 이들은 곤욕을 치르진 않았다, 그저 묵살만 당했을 뿐이다. 분명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용감하게 행동했는지, '의지로 두려움 없이 가장 낮은 곳에 갔었노라.'라고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스스로를 위안했을 것이다. 


보조 말로는 이런 사람들이 한 달에 몇 차례고 여인숙에 찾아온다고 한다. 이 사람들은 경찰에 영향력이 있어서, '대리인'도 거부할 수 없다고 한다. 궁금할 수밖에 없다, 어떡해야 사람들은 누군가의 소득이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지자마자 그들에게 설교와 기도를 해줘도 되는 권리가 생긴다고 당연시 여기게 되는 것일까.  


B로부터 돈을 받고 9일이 지난 뒤 돈은 1실링 9펜스로 줄어 있었다. 패디와 나는 숙박료 8펜스는 따로 빼두었고, 3펜스는 차 한잔에 빵 두 조각에 썼다, 하나를 시켜 둘이 나누었다-식사라기보다는 간식에 가까웠다. 오후가 되자 지독히도 배가 고팠다, 패디는 킹스 크로스 역 근처에 있는 교회를 기억해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부랑자에게 무료로 차를 나눠준다 했다. 그 날이 그 날이었고, 우리는 그곳에 가기로 결정했다. 보조는, 비도 오고 한 푼도 없었음에도, 교회는 자신이랑 맞지 않는다며 오지 않았다. 


교회 밖에는 100여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러운 행색을 한 사람들은 공짜 차 소식을 듣고 저 멀리서부터 모여든 것이다, 죽은 버펄로를 감싸고 맴도는 솔개들 같았다. 얼마 안 있어 문이 열렸고 성직자 한 명과 소녀들이 나와 우리를 교회 위층의 회랑으로 안내했다. 복음주의 교회였는데, 벽 여기저기에는 피와 불에 관한 글들이 새겨져 있었고, 삭막하고 일부러 꾸미지 않은 티가 났다, 찬송책은 1250개의 찬송가를 담고 있었는데, 몇 개의 찬송가를 읽어보고, 단순히 양만 많고 고약한 운문으로 채워진 문집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차를 마신 뒤 예배가 있었고, 평신도들이 밑층 예배당에 앉아 있었다. 그날은 평일이었기에, 20-30명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지저분한 늙은 여자들이 다수였는데 털 빠진 새들을 연상시켰다. 우리들은 회랑 의자에 앉았고 차를 받아 마셨다. 차는 1파운드 잼 단지에 담겨 나왔고 6조각의 빵과 마가린도 함께 나누어 받았다. 차를 마시자마자 문가 쪽에 앉았던 열몇 명의 부랑자들은 예배를 피해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나머지는 남았는데, 도망갈 엄두를 못 낸 사람보다 감사해하는 사람이 더 적었다. 


오르간 소리를 확인하자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신호라도 맞춘 듯, 부랑자들이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교회에서 실제로 벌어진 광경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도처에서 부랑자들이 예배당 의자에 누웠고, 웃고, 떠들고, 몸을 숙이고는 빵 알갱이를 신도들에게 던졌다. 나는 담배 불을 붙이려는, 거의 힘을 써가며, 내 옆의 남자를 제지해야만 했다. 부랑자들은 예배를 순전히 재미난 구경거리로 취급했다. 그게, 사실은, 충분히 터무니없던 예배이기는 했다-'할렐루야' 외침이 뜬금없이 터져 나왔고 여기저기서 끝나지 않는 통성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그럼에도 부랑자들의 태도는 도가 지나쳤다. 신도들 중 늙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부틀 형제님이라는 것 같았다-우리를 기도시키게끔 요청받은 사람인데, 그가 일어설 때마다 부랑자들은 극장에서 하듯 발을 쿵쾅거렸다. 부랑자들이 말하기를 이 남자가 이전 예배에서 목사가 말리기 전까지 25분간 통성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했다. 부틀 형제님이 다시 일어나자 한 부랑자가 '십중팔구 넌 7분도 못 견딜걸!' 소리가 너무 커서 교회 전체에 들렸다. 목사보다 목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가끔은 누군가가 분에 찬 '쉿' 소리를 올려 보냈다 그래도 별 효과는 없었다. 우리들은 예베를 놀려 먹으려 마음먹었고, 무엇도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정말 이상하고, 넌더리 나는 광경이었다. 밑에서는 몇 안 되는 순박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고, 위에서는 음식을 얻어먹은 백여 명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예배를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더럽고, 털이 덥수룩한 남자들이 회랑에서 비웃으며, 거리낌 없이 야유와 조롱을 보냈다. 몇몇의 늙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백여 명의 난폭한 부랑자들을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우리를 두려워했고, 우리는 그들을 노골적으로 괴롭혔다. 음식을 먹여주며 우리들에게 굴욕을 안겨준 그들에 대한 복수였다. 


목사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위층에서 들리는 키득거림과 떠드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여 호수와에 대한 긴 설교를 했다. 하지만 결국엔, 인내의 한계를 넘었는지, 큰 목소리로 선언했다. 


'마지막 남은 5분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들에게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회랑 쪽으로 고개를 들어 진짜로 오 분을 있어갔다, 누가 구원을 받고 누가 구원을 못 받았는지 확실히 했다.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목사가 지옥불로 우리를 위협할 때는, 담배를 말았고, 마지막 아멘이 나올 때는 고함을 치며 내려갔다, 다음 주에도 또 공짜 차를 마시러 오자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은 내 흥미를 자극했다. 평소 부랑자들의 태도와는 너무 달랐다-비참한 벌레같이 감사해하며 자선을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것과는 말이다. 설명을 해 보자면, 당연히, 우리의 숫자가 신도들의 수보다 많았기에 그들을 겁내지 않았다. 자선을 받은 사람은 그들의 후원자를 거의 언제나 싫어한다-이는 고정된 인간 본성의 성질인데, 이 사람 뒤에 50명에서 100명의 사람들이 있을 때는, 이런 성질을 보여 줄 것이다. 


저녁이 되어, 공짜 차를 마신 뒤, 우연찮게 패디는 '빈 차 봐주기'일로 8펜스를 벌 수 있었다. 정확히 하룻밤은 더 잘 수 있는 돈이었다, 우리는 돈을 챙겨두고 다음 날 저녁 9시까지 굶었다. 우리에게 음식을 줄 수 있었을지도 모를, 보조는,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었다. 도로가 질퍽했기에, 보조는, 이미 알아 둔 장소가 있는, 엘레판트 엔 캐슬 거리로 갔다. 운이 좋게도 나에겐 담배가 남아있었고, 그렇게 더 나쁠 수 있던 날이 지나갔다. 


8시 반이 되어 패디는 나를 템스 강둑으로 데리고 갔다, 성직자가 일주일에 한 번 무료식권을 나눠준다고 알려진 장소가 있었다. 채링 크로스 다리 밑에 50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들 푸들같이 떨고 있었다. 그중 몇몇은 지독히도 형편없는 상태였다, 강둑에서 자는 사람들이었고, 템스 강둑은 수용소보다 더 최악으로 기억에 세겨졌다 그중 한 명은, 단추가 없는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외투를 밧줄로 동여 메고 있었고, 넝마 바지에, 발가락들이 신발 밖으로 튀어나와있었다, 넝마 그 자체였다. 그의 수염은 이슬람의 고대 수행자처럼 자라 있었고, 기차 기름과 비슷한 흑색의 더러운 오물을 가슴과 어깨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머리 밑으로 보이던 것은 악성질병 환자의 표백된 종이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가 말하는 걸 들어보니, 꽤 괜찮은 억양을 가지고 있었다, 점원 아니면 매장 감독관 같았다. 



성직자가 모습을 나타냈고, 사람들은 그들이 도착한 장소에 모여든 순서대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성직자는, 친절하고, 통통한, 젊은 남자였다. 정말 기묘하게도, 파리에 있는, 내 친구 찰리와 닮아있었다. 그는 수줍음을 타며 부끄러워했다, 짧은 저녁 인사 외에는 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줄을 따라가며 각 사람들에게 식권만을 찔러 넣어주었고, 감사하다는 말은 기다리지도 않았다. 이런 행동의 결과로, 처음으로, 진심 어린 감사함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성직자를-괜찮은 친구라고 칭찬했다. 누군가가(성직자도 분명 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외쳤다. '이런, 저 사람 주교는 절대 못 되겠군!' 이 말의 의도는, 당연하지만, 따뜻한 칭찬이었다. 


식권의 가격은 6펜스 정도였고 멀지 않은 값싼 식당이 쓰여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의 주인장은, 부랑자들이 다른 곳에는 못 간가는 걸 알았고, 각 식권마다 4 페니 어치에 해당하는 음식만을 내주며 등을 쳐 먹었다.  패디와 나는 같이 식권을 냈고, 다른 커피숍에서 6펜스나 8펜스어치에 해당하는 음식을 받아 들었다. 성직자는 1파운드가 넘는 식권을 나누어 주었는데, 주인장은 여기서 일주일에 7실링 또는 그 이상을 부랑자들에게 등쳐 먹었다. 이런 부당함은 부랑자들의 삶에 당연한 부분이고, 돈이 아닌 식권을 부랑자들에게 주는 한 언제고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패디와 나는 여인숙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배가 고팠고, 주방에서 어정거리며, 음식을 불의 따스함으로 대체했다. 열 시 반이 지나자 보조가 돌아왔고, 초췌한 모습으로 피곤에 절어있었다, 짓이겨진 발은 걸음조차도 극도의 고통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도 한 푼을 벌지 못 했다, 보호소 밑의 자리들은 이미 누군가가 이미 선점했고, 그는 경찰들의 눈치를 봐가며, 구궐을 할 수밖에 없었다. 8펜스를 모아서 왔지만-숙박료 1펜스가 부족했다. 방세를 낼 시간은 이미 한 참 지났고, 대리인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자는 수밖에 없었다. 걸리기라도 하면 쫓겨나고, 강둑에서 잠을 자야 했다. 보조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물건들을 꺼내 살펴보며, 무엇을 팔지 고민했다. 면도기를 팔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들고 주방을 한 바퀴 돌았다, 몇 분 후 면도기를 3펜스에 팔았다-차 한 잔을 마시고, 숙박료를 낸 후 반 페니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보조는 차를 들고 불 옆에 앉아 옷을 말렸다. 그가 차를 마시며 혼자 웃는 게 보였다, 재밌는 농담에 웃는 것 같았다. 놀란 나는, 뭐가 그리 재밌냐고 물었다. 


'우라질 웃기지!' 그가 말하길, '한 대 맞은 것처럼 웃겨. 내가 방금 뭘 한 것 같아?' 


'무엇 말인가?' 


'면도도 하지 않고 면도기를 팔다니, 하필이면 이런 멍청한 짓을 했어!' 


그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 했고, 몇 마일을 꺾인 다리로 걸었다, 옷은 전부 젖어 있었고 그와 굶주림 사이에 남은 건 반 페니가 전부였다. 이 모든 악조건을 가지고도, 면도기를 잃었음에 웃고 있었다. 이 사람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가의 이전글 3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