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걷기: 선반을 바라보며

버리지 못했던 이유를 천천히 이해하는 시간

by 호수를 걷다




때로 삶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정리’라는 방식을 통해 조용히 삶을 응시해보고 싶어졌다.


‘삶과 감정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다.

하지만 회피하지 않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응시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응시하고 바라본 것에 의미를 품을 필요가 있다.

나에게 ‘정리’는 삶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삶의 방식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것들에게 이렇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지금은 말할 수 없지만, 괜찮아질 때까지 곁에 둘게.'








현실에 충실한 삶. 한 달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다음 날을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특히 새해 전날은, 그런 바람이 더 많아지는 날이다.


나는 늘 다가올 날들을 준비하며 애써왔던 것 같다.

하지만, 지나가는 날들에 대해 깊이 귀하게 여겨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 달의 끝을 돌아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건 늘 ‘언젠가 해야 할 일’로만 남겨두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많은 일이 쌓이고, 나 자신을 마주보기 시작하고,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해를 꼭,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은 계속 쌓였고, ‘다음 달엔 못다한 작년 마무리를 꼭 의미있게 마무리하자’는 마음만 남긴 채, 2월, 3월…그렇게 6월까지 지나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무심코 바라본 책장의 한 구석에서 내가 오랫동안 외면해왔던 감정들이 조용히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낯선 메모들과 책들로 빼곡이 채워진 선반을 바라보며 더는 담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정리 할 때가 된 것 같다. 나는 먼지가 쌓인 책들과 물건들을 정리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정리한다는 것은 물건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성가심과 버리고 나면 나중에 필요할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다.

물건을 쉽게 버리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어릴 적엔 ‘물건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으며 자랐고, 어른이 되어서는 ‘물건을 잘 버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나는 후자의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운 사람이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내가 일하며 사용했던 물건만큼은 쉽게 버릴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하나씩 물건을 바라본다.

그 물건들 안에는, 단순한 정리 이상의 시간이 스며 있다. 정리하는 행위는 어느새, 삶을 되돌아보는 조용한 응시가 된다.

그 시절 물건을 샀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때 내가 왜 그것을 골랐는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남겨두었는지 떠오른다.

무엇보다 그때의 감정과 생각, 행동을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의 나로서 다시 마주하고 느껴볼 수 있다.


그렇게 조용히 바라보다 보면, 꼭 다른 곳에서 풀어야만 할 것 같았던 마음의 실마리가,

그 경험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열린다.

어쩌면, 멀리서 나를 고요히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시선의 경험같기도 하다.



그때 그 물건을 사서 서랍에 넣어두고, 메모를 적었다는 건 물건을 산 행위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건 그때의 많은 감정과 시간들이, 물건이라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단순히 소비하기 위해 구매한 물건들은 이미 사라졌을 것이고, 지금도 사용중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는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며 남겨두었던 물건이나, 무언가 적어두었던 메모들은 버리지 말아야 할 의미를 가진다.


그 때 넣어두었다는 것은 아마도, 그 때는 그 감정과 느낌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때는 어떻게 사용할지 몰랐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오래된 바람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물건을 소중히 여긴다는 건 참 다정한 일이다.


그런데 사람은 생각보다 참 바쁘다. 그리고 공간은 언제나 한계가 있다.

언젠가는 물건들이 쌓이게 되고, 그건 첫 마음과는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선반에 쌓인 물건들을 바라볼 때마다 은근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언젠간 치워야지.’라는 말을 내 마음속에서도,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주 듣는다.

그렇게 시작된 공간이 어느새 ‘정리해야 할 과제’가 되어버린다.


나는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다시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는 조용한 바람으로 메모지들을 치워본다.

물건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앞으로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지, 어떤 기억을 만들고 싶은지 떠올려본다.

그건 나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중요한 감각이다.



정리하는 일이, 점점 즐거워진다.

하나씩 물건을 들여다보는 그 시간 안에서, 과거의 나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 시절의 마음과 흔적을 떠올려 본다.

그러다 보면, 지금의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아주 조금은 알게 된다.

그리고 문득, 이제는 내 공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조심스럽게 내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작은 기쁨이 스며든다.


정리에는 다정함이 있다.

그건 단지 물건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공간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기도 하다.

흩어진 시간을 천천히 되짚으며, 내가 머물던 자리들을 조금씩 다시 만져본다.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정리해 보면, 그 안에서 나와 다시 이어지는 감각을 조심스럽게 느낄 수 있다.



언젠가 사람들과, 그런 정리에 대해 편안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지금은 아직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이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기를.

그때 우리는, 버리지 못했던 것들 안에 머물렀던 마음을 함께 이해하며, 조금 더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름 저녁의 마음으로, 삶을 응시하듯 선반 앞에 머무릅니다.

버리지 못한 것들 안에서,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시간을 떠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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