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걷기: 휴식이 머무는 시간

불빛을 끄고, 나에게 돌아오는 밤

by 호수를 걷다






“당신도 한 번쯤, 모든 불빛을 끄고 쉰 적 있나요?

전등도, 휴대폰 화면도 모두 끄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어둠을 마주한 밤.
그 밤은, 우리가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천천히 깨우고,

생각보다 더 다정한 공간이 되어줄지도 몰라요.”









돌이켜보면, 지난 10년 가까이 나는 앞을 바라보며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이자, 옳은 방향이라고 믿었기에 저 멀리 목적지를 정해두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나를 맞추려 애써왔다.


사회에는 지켜야 할 약속된 시간이 있었고, 나는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늘 바쁘게 움직이며 하루를 채워갔다.



사회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축적된 기준과 평균, 그리고 보편적인 삶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따르도록 요구한다.

그렇게 살아가면, ‘잘 살아온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각자의 삶에는 고유한 맥락이 있고, 살아온 사회적 배경도 다르다.

그런데도 사회는 하나의 고정된 기준을 내세운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준과 평균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기준과 사회적 평균값으로 스스로를 바라보면, 애쓴 것에 비해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고, 그 사실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그래서 반성하고 성찰하며 살아가는 일이 점점 더 어려운 삶이 되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어딘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고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겪은 고통과 배려의 마음으로, 어느새 스스로가 그 기준 위에 서게 된다.

그리고 타인에게 말하게 된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다 왔다’며, 조금은 멀리서 이야기하게 된다.

그 말이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지라도, 그 이야기는 때때로 나를 아프게 한다.


그리고 그 상처는, 직접 들려온 목소리였을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이 자기 삶에 초조해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내면의 목소리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는, 그게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기준에 맞춰진 목소리와 멀리 보이기만 하는, 정확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그저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내가 자라난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 스케줄표를 사용하는 문화가 유행처럼 번졌고, 그 유행은 자연스레 일상의 습관이 되었다.

나에게 스케줄표는 하루를 잘게 나누어 효율적으로 살아가게 해주는 도구였고,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루를 미리 계획하고, 할 일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은 효율적이면서도 내 삶에 작은 의미를 더해주곤 했다.

그리고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스케줄표를 언제든 간편하게 꺼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편리함은 감사하게도 삶을 효율적으로 살아가며 개인의 역량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스케쥴표는 하루 일과를 모두 완료했는지 체크하는 방식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삶의 리듬이 맞춰져 버린 것 같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잘게 나누어 효율적으로 살아낼 수는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시간에 쫓기고, 시간이라는 틀 안에 갇힌 채 살아왔던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와서야, 그 흐름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때는 내가 얼마나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어딘가 진정되지 않았고, 감각 또한 무뎌진 채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아프다는 것은 곧, 내일의 스케줄을 미루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그 미룸을 견디는 일은 참 어려웠다.

현실 속에서 미룬다는 건 때로는 기회를 통째로 놓친다는 뜻이 되기에—

혼자서 그 결정을 내리고,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은 길이었다.


다만, 감사하게도 나는 그 이야기를 용기 내어 사람들에게 전할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그 말을, 그들은 인정해주었다.

어떤 모임에서는 오히려 축하를 받기도 했다.


이 놀라운 경험은 내가 휴식하는 동안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개인적이면서도 존재적인 두려움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 그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고 천천히 풀어갈 수 있도록 안정된 준비 기간이 되어주었다.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회복기나 휴식 기간을 스스로 정하고, 그 시간을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알리는 용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또한, 누군가의 휴식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그 시간을 함께 지켜주는 경험이 마음을 부드럽게 가라앉혀준다는 것도.




지난 밤, 나는 낯설게도 휴대폰과 스탠드의 불빛을 모두 끄고 밤을 맞이했다.

그 밤을 온전히 맞이하기까지,

처음 겪는 고통과 아픔을 지나

회복의 시간을 거쳐야 했고,

그 안에서,

온전한 휴식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조용히, 그리고 오래 필요했다.



그리고 그날, 처음 맞이한 까맣고 고요한 밤.

그 밤은 불빛에 익숙했던 눈을 쉬게 해준 고마운 밤이었다.

늘 일상과 업무 속에서 모니터와 화면의 빛에 둘러싸여 긴장해 있던 눈이 그 밤엔 처음으로 편안해졌다.


언젠가부터, 모니터는 내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캄캄한 밤’이 어떤 것이었는지, 나는 완전히 잊고 지냈다.

슬프게도, 그 밤을 잊은 건 마음만이 아니라, 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어둠이 익숙하지 않았기에, 모든 불빛을 끄는 일조차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진정한 휴식을 취해보고 싶고, 회복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마침내 불을 꺼보자는 용기로 나를 조용히 이끌어주었다.


처음엔 그 어둠이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곧 어둠에 익숙해졌다.

창문 사이로 스며드는 옅은 어둠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낭만’이라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20대에 나는 지금보다 어둠을 덜 두려워했다.

저녁의 푸른 밤과 새벽의 깊은 어둠 속에서 자유로움과 그 분위기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감각이 분명 내게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런 감각들을 잃어버렸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참 성실하게 꿈을 이루고자 애쓴 결과이기도 했다.



어제 그 밤, 그 분위기를 품은 채 나는 정말 오랜만에 푹 쉬었던 것 같다.

그 밤은, 고요함과 자유로운 감각, 그리고 휴식이 함께 머무는 시간이기도 했다.

진심으로 쉬기를 바라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두에게도, 그런 밤이 한 번쯤은 찾아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 밤을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조금 더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다정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당신에게도, 불빛을 모두 끄고 쉰 밤이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런 밤이 한 번쯤은 필요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깊은 밤, 불빛을 잠시 꺼보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어둠을 품은 밤.
그 밤은, 다시 나 자신을 조용히 껴안을 수 있도록 가만히 곁에 머물러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