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벽
※ 이 작품은 가정 내 갈등과 폭력을 다루는 심리소설(픽션)입니다.
불편한 장면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술집 문을 나섰을 때, 바닷바람이 먼저 얼굴을 훑었다.
늦가을의 해무가 부두 쪽에서 밀려와 골목 끝 가로등 불빛을 희미하게 삼켰다. 흰 김을 뿜으며 오징어를 굽는 포장마차가 줄지어 있었고, 술 냄새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나는 무심코 목을 움츠렸다. 술잔을 세는 건 진작에 포기했다. 처음엔 한두 잔만 하고 일어나자고 마음먹었는데, 동석한 과장과 선박 검사관이 ‘오늘은 풀어야 한다’며 잔을 부딪칠 때마다, 그 다짐은 가볍게 무너졌다.
포항 선박회사 법무·보험팀에 들어온 지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처음엔 모든 게 버겁고 거칠었지만, 몇 년 지나니 회사 일보다 술자리가 더 힘들어졌다. 항구 근처에서 사고라도 나면 그날 저녁은 거의 의례처럼 이어졌다. 오늘도 그랬다. 부두에서 컨테이너를 내리던 중에 인부 하나가 발을 다쳤다. 응급실로 옮기고, 보험 서류를 챙기고, 관계자와 통화하는 사이, 몸 안의 긴장이 쌓였다. 잔에 술을 부을 때마다, 그 긴장이 잠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형님, 요즘 사모님은 잘 계시죠?”
과장이 무심하게 던진 질문에, 나는 웃는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있다’는 말 대신, 술잔을 들이켰다. 그 한마디가 목에 걸릴까 두려웠다. 집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몸 속 어딘가가 서늘해진다. 그 차가움이 올라오지 않게 하려고, 나는 더 빨리 마셨다.
술집을 나와 집까지 걷는 길은 늘 비슷했다. 좁은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오면, 먼 바다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바닷물 비린내와 제철소 굴뚝에서 날아온 매캐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내 옆을 스쳐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바쁘게, 혹은 즐겁게 걸었다. 그 틈에서 나는 혼자였다. 한때는 아내와 함께 걸었던 길이다. 결혼 초, 포항으로 이사 온 첫날 밤, 우리는 항구 근처 여관에 묵었다. 그때 아내는 하얀 스웨터를 입고 있었고, 긴 머리카락 끝이 바닷바람에 흔들렸다. 나는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그 기억은 점점 빛이 바래고, 바다의 짠맛만 남았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오늘은 조용히 들어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수십 번 말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씻고 누우면 된다고. 그런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TV 소리가 먼저 귀에 닿았고, 그 뒤로 가늘게 아내의 목소리가 스며나왔다. 그 목소리가 비난인지, 슬픔인지, 오래된 한숨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취한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이건 내가 견뎌야 할 목소리다.’ ‘아니, 이젠 나도 한마디 해야 한다.’ 두 마음이 서로 맞부딪혔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열쇠가 손끝에 닿았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열쇠인지, 담배인지, 아니면 그저 주먹을 쥔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어쩌면 그것은 술기운 때문일지도 모른다. 벗어나고 싶었다. 집이 아니라, 이 골목이 아니라, 포항이 아니라, 술과 후회의 굴레로부터. 단 한 번이라도 깊은 수렁 위로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문고리를 잡았다. 금속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안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 짧은 순간,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 얼굴이었는지, 무표정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얼굴 속에서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아직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