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녀의 시선 #1

고요한 순간

by 호수를 걷다

※ 이 작품은 가정 내 갈등과 폭력을 다루는 심리소설(픽션)입니다.

불편한 장면이 있을 수 있으며,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머리칼이 잡아당겨졌다.

목덜미부터 정수리까지, 순간적으로 뜨거운 기운이 번쩍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날은, 놀라움도, 분노도 오지 않았다. 몇 초간은 통증이 있었지만, 그것마저 금세 무뎌졌다. 마치 피부 위에서만 스친 고통이 깊숙이 스며들지 못한 것처럼. 그 자리는 오래전부터 상실로 잠겨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동시에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몸은 거실에 있었지만, 시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감정이 고여 있던 자리에서 빛이 빠져나간 눈동자. 그 눈은 오래 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혼 초의 나는 그 시선을 믿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변할 수 있다고, 다시 웃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믿음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반복되는 굴레는 사람을 갈아 넣었다.

머리칼을 움켜쥔 손이 느껴졌다. 거친 손등의 감촉. 이 손은 한때 나를 감싸 안았던 손이었고, 바다바람을 막아주던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목덜미를 죄어오는 손이었다. 그 모순이 숨 막혔다.




나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이 집의 공기는 오래전부터 고요를 강요받고 있었다. 고요는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폭풍을 피하기 위한 거짓된 휴식이었다. 말하면, 폭풍은 더 커졌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대신 시선이 옆방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우리 딸이 있었다.


수인.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아이. 겨울만 되면 열이 쉽게 오르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그 아이가 자라 대학에 들어간 지금도, 나는 여전히 ‘아픈 자녀’를 걱정했다. 걱정은 오래된 습관이 되어 버렸고, 습관은 불안과 뒤엉켜 나를 잠식했다. 내가 맞아야 할 고통보다, 그 아이가 겪을 불안이 더 두려웠다.


그날 밤, 나는 거실에서 부엌으로 걸어갔다. 발바닥에 닿는 마룻바닥의 차가움이 기묘하게 선명했다. 설거지가 덜 된 접시들이 싱크대 위에 쌓여 있었다. 그 사이에 작게 부서진 컵 조각 하나가 있었다. 그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날카로웠다. 손끝이 살짝 베였지만, 피는 나지 않았다. 그 작은 통증이 오히려 안심이 됐다. ‘아, 아직은 감각이 남아 있구나.’


부엌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차갑게 스며들었다. 항구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멀리서 부두의 경광등이 깜박였다. 그 빛이 거실 천장에 희미하게 반사되었다. 깜박임에 맞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오래된 그림자들이 일어났다. 결혼 전, 나는 이런 삶을 상상하지 않았다. 서른의 나는 포항이라는 도시를 그저 ‘바다가 있는 곳’으로만 생각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살면 마음이 넓어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점점 더 좁아졌다.




남편은 여전히 거실에 있었다. 그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술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단순히 알코올 냄새 때문이 아니었다. 그 냄새 속에는 오래된 변명, 미안함과 후회의 기척, 그리고 변하지 않는 약속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한 번도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 그 약속들이 내게 남긴 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법이었다.


거실을 지나 방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았지만, 소리는 완전히 차단되지 않았다. 바깥에서 TV 소리가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단조롭게 이어졌다. 무슨 내용인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의 석고 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규칙적인 선. 그 선을 따라 눈동자를 옮기다 보면, 생각이 느리게 풀렸다.


그러다 문득, 아주 오래전의 장면이 떠올랐다. 수인이 세 살이던 겨울, 병원 대기실에서 아이를 안고 있던 나. 아이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며 열을 식히려 애쓰던 내 모습. 그때 남편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술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지금도 기억나지만, 그 순간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과 비슷했을 것이다. 표정 없는 얼굴.




머리맡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수인의 이름이 떴다.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할지, ‘도와달라’고 말해야 할지, 잠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오늘 밤도 아이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이다. 내 행복 때문이 아니라.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방 안의 공기가 천천히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는 오래 살 수 없다.’ 하지만 그 결심은, 아직 목구멍을 넘어오지 못했다. 오늘은, 그냥 오늘을 넘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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