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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r 15.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네 번째 날

산토베니오 오카 - 부르고스 (25km)



 새벽 6시를 조금 넘겨 출발했다. 일어나서 짐을 챙겨내려와 1층의 식당 의자에서 주섬주섬 준비할 때 R이 먼저 앞서 출발하는 걸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같이 저녁 술상을 함께한 J 커플도 새벽 일찍 출발한 듯싶었다. 엄청나게  조용하고 작은 마을인 데다 정식 까미노가  아닌 우회 루트라 그런지 까미노 표식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다른 소도시들과 달리 적절한 표시가 없어 어플과 구글 지도를 보고 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들어선 마을 외곽의 길은 정말 칠흑같이 어두워서 여기가 정말 까미노가 맞는 건가 싶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달빛 가득한 새벽의 까미노. 사진보다는 훨씬 밝았는데 역시나 제대로 나오진 않았다


달빛 아래의 순례자



  넓고 먼 평원에 작은 오솔길이 나 있고 호젓한 달빛이 오솔길 곳곳의 작은 물 웅덩이들을 비추었다. 서쪽하늘 멀리 이제 저물기 시작한 달은, 그러나 아직도 퇴근 시간이 한참  남은 듯 새까만 밤 속에서 아름다운 별빛과 푸른 구름들과 함께 떠 있었다. 어차피 길은 쭉 뻗어있고 앞서가는 사람의 뒤꿈치를 밟을 일도 없겠다 싶어 아예 고개를 쳐들고 하늘만 바라보며 걷다 몇 번 물웅덩이를 밟은 듯도 했다. 해가 뜨고 밝아지면 이 풍경을 더는 볼 수없을 거란 생각에 안타까워하다가, 정작 평원 길이 끝나고 고속도로 갓길 옆으로 표시된 까미노로 진입했을 땐 어둠이 정말 원망스러워졌다. 

 

  아마 고속도로까지는 아니고 지방도로 정도였겠지만 가로등도 변변치  않은 갓길을 어둠 속에서 걷는 내 마음은 아우토반 옆을 걷는 기분이었다. 헤드라이트를 도로의 반사판에 비춰가며 걷다가 멀리서 차가 오는 낌새가 느껴지면 황급히 헤드라이트를 점멸 모드로 바꿔 '이곳에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리고서, 가드레일을 생명줄처럼 꼭  붙잡고 있으면 굉음을 내며 큰 트럭이 내 옆을 지나가고, 그 트럭이 일으킨 바람에 도로 쪽으로 휘청하기 일쑤였다. 트럭 운전자들도 앞에 사람이 있는 걸 인지한 건지 가드레일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중앙선을 넘을 정도로 비켜가 주어서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내 앞에서 걸어갔을 것이 분명한 다른 한국인 순례자들이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조금 가다가 보니 (아마 그 구간이 더 길어야 했다면 위험 때문에 다른 까미노가 개척이 되었어야 했을 거다) 작은 마을이 길 건너편에  나타났다.

 

  또다시 목숨을 거는 기분으로 큰 차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헤드라이트를 깜빡이며 재빨리 길을 건너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 입구의 아스팔트 길에 있는 물 웅덩이에서 진흙투성이인 내 신발 밑창을 가볍게 씻어주고 조금 들어가자 보이는 마을 성당 앞에 선 채로 살아서 이곳까지 오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다. 


  그 마을을 지나 역시 군데군데 물 웅덩이 가득한 오솔길을 지나 또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시간은 8시쯤 되었고, 아마 동네에서 순례자를  대상으로 하는 바들은  슬슬 문을 열었을 것 같아 여기서 아침을 먹어야겠다 생각하고 구글 리뷰에서 리뷰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마음속으로 찜 해두고 마을로 들어갔다.


  문득 10여 년 전 처음 유럽여행을 갔을 때 가는 성당, 유적마다 공사 중이었던 저주(?)가 떠올랐다. 내가 가려고 했던 식당은 한 블럭이 통째로 공사 중이었고 두 번째로 가려고 생각했던 식당 역시 문을 닫은 상태였다. 평점이 제일 별로인 바 Bar하나만 문을 열고 근처 주민들(아마도 큰 트럭을 몰고 다니는 운전기사들로 보이는)을 대접하고 있었다. 여기라도 들어가야 하나 갈등하고 있을 무렵 R을 다시 만나 함께 그 바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유일한 아침밥



 역시 아침이라 그럴듯한 타파스는 없고 빵 사이에 하몽을 끼운 작은 샌드위치 하나와 커피 하나를 시켰다. 아무래도 이 나라 사람들은 아침밥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화장실도 들렀다가 R과 함께 길을 나섰다.

스페인 한복판의 순례길을 걷는 중에 만나는 사람들마저도 한국인이 대부분이라 스페인어보다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고 있다는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부르고스를 향해 걸었다.



식당은 어디에


 

 그렇게 우리가 걷는 길은 전통적인 까미노 루트라기보다는 번외 루트라서 걷는곳마다 다른 순례자도, 문을 연 바 Bar도 없었다. 약 3-4시간 동안  몇 개의 마을을 지나면서 식당 비슷한 곳이 있나 찾아봤지만 모두 문을 닫았거나 영업을 하고 있지 않았다.

 

  인심은 곳간에서 난다더니, 8시경에 먹은 빵 외엔 아무것도 먹지 못해 너무 배고플 지경이 되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짜증이 심해졌다. 적당한 말로 R을 먼저 보내고 나는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로그로뇨에서 사두었던 초코바 트윅스 몇 개가 있어 그걸 조금씩 까먹으며 부르고스로 진입했다. 



 부르고스 외곽의 공원 같은 곳의 산책로가 까미노와 이어져있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시민들이 나와 산책하거나 햇볕을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지친 순례자인 나는 어서 이 숲이 끝나고 ‘진짜 부르고스’가 나타나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거리만으로 보면 부르고스 구도심까지는 500여 미터가 남아있었고, 천천히 걸어도 10~15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는데도 나는 거의 50미터마다 한 번씩 앉아서 쉬어가며 걸어가야 했다. 힘들다는 것만 빼면 참 예쁜 길이었는데 , 부르고스에 도착해서도 부르고스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듯했다. 그렇게 거의  기어가는 속도로 구도심에 들어와서 좀비의 몰골로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평소에는 체크인하고 바로 샤워하는 편인데,  배가 너무 고팠기에 짐을 던져두고 숙소 근처의 바에 가서 타파스 몇 개 주문해서 폭풍 흡입했다.





부르고스의 부르고스 - 시내 구경



  숙소에 돌아와선 샤워, 빨래를 하고 한참 자다 일어나서 부르고스 구경을 나섰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부르고스 대성당은 오래된 순례길의 도시라 그런지 순례자 할인이 따로 되는데, 순례자의 증명서인 크레덴시알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숙소에 다시 가서 두고 왔던 크레덴시알을 챙겨 나와 순례자 할인을 받아 성당 구경을 했다. 엄청나게 크고 화려해서 성당이라기보단 박물관에 가까웠던 느낌이다.

 

  그리고 슬렁슬렁 나와서 근처에 있다는 중국 마트에 가기 위해 버스에 탔다. 2 정류장 정도의 거리라 걸어도 되었지만 까미노 사인 거의 없는 길을 하루 종일 걸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더는 걷고  싶지 않아 작은 사치를 좀 해보기로 했다. 네이버 리뷰와 구글 로드뷰까지 봐가며 힘겹게 중국 마트에 간 이유는 그곳에서 한국 라면들을 판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는데, 정작 도착한 곳에서는 한국의 웬만한 라면들은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매콤하고 얼큰한 신라면 대신 이름만  들어도 안 매울 것 같은 ‘순라면’(심지어 농심에서 만든 거다)한 봉지를 사서 터덜터덜 나와야 했다. 거의 안 되는 스페인어와  번역기 어플로 중국 상점 주인의 말을 들어보니 한국인들이 너무 많아서 마드리드에서부터 한국 라면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한다..... 대체 이 길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걷고 있는 걸까. 외국까지 나와서 한국 라면을 찾는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까지 한국음식을 먹어야 하나’ 싶었던 나인데 이젠 내가 그러고 있다.

 

 그렇게 걷다 너덜너덜해진 내 미 밴드 밴드(계속 빠져서 고무줄로 칭칭 묶어서 고정시켜둔 상태였다)를 사기 위해 부르고스의 샤오미 매장을 찾아갔다. 말은 거의 안 통했지만 흐물거리는 미 밴드를 보여주고 ‘미 밴드 2’ 하니 호환되는 밴드를 좌라락 보여주는데, 형광핑크, 형광 하늘색, 국방무늬, 꽃무늬다. 검은색은 없냐고 물어보니 그건 없다 해서 할 수 없이 그나마 제일 무난한 꽃무늬를 골라 숙소로 돌아왔다. 그래도 큰 도시라 샤오미 매장이 있어 다행이었다. 숙소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비누와 물을 사서 숙소에 던져두고 부르고스에 유명하다는 타파스를 먹으러 길을 나섰다.


   홍합 타파스가 유명한 집을 한국에서부터 추천받아서 간 건데, 정말 띠용 할 정도로 맛있었다. 홍합에 피클, 양파, 파프리카 초절임이 올라가서 상큼하고 감칠맛이 가득 돌았다. 와인도  두 잔이나 마시고 기분 좋게 나와 부르고스 대성당 광장을 지나는데 낯익은 얼굴! 어제 같은  숙소에 묵었던 J 씨 커플이다.  광장에 앉아 잠시 이야기하다 숙소에 들어가  씻고 잠들었다.





유튜브에 영상 있어요~


>>https://youtu.be/ISEAnjz_HRU



부르고스 구경 영상 


>>https://youtu.be/eJwS87ovAV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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