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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r 14.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세 번째 날

벨로라도 - 산토베니오 오카 (28km)


해를 등지고, 달을 마주하며 걷는 길


  일찍 일어나서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이미 5시 40분이었다. 전날 비가 와서 가지고 다니던 케이블로 빨랫줄을 만들어 침대 사이에 걸어 거기에 빨래를 널어두었지만 조금도 마르지 않았다. 2층 침대에서 뒹굴 거리는 동안 내 물병은 침대와 벽 사이 어딘가로 떨어졌고 비몽사몽간에 내려와 물병을 챙겨 아침 씻을 준비를 하러 나갔다. 아직도 잠들어  있는 순례자들도 많았기에 가방에 짐을 대충 욱여넣어 식당으로 나왔다. 어젯밤에 스페인 쌀로 만든 밥에 튜브 고추장을 짜서 대충 만들어둔 주먹밥을 먹으며 짐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양치까지 끝내고서 같은 숙소에 묶었던 많은 한국인중(놀랍게도 그들 중 대부분이 나보다 한참 앞서 길을 떠난 상태였다) 출발하려는 참이었던 도현 씨와 함께 길을 나섰다.


 노란 가로등이나마 점점이 있던 시가지를 벗어나자 헤드라이트 없이는 걷는 게 어려울 정도의 어둠이 나타났다. 다행히 점점 먼 동이 터오고 있어서 큰 걱정 없이 구름 속의 희미한 달을 바라보며 걸었다. 갈수록  일출의 웅장한 모습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잡아댔고 그에 맞춰 월몰도 장엄한 모습이었다. 해를 보면서 걸을 순 없어도 지는 달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등 뒤로 순례자를 비추는 일출
투명하게 떠있는 달과 해바라기 밭




 작은 마을에 어울리지 않게 큰 규모의 바에 들러 도현 씨는 아침을 먹고 나는 발을 말리며 잠시 쉬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날은 조금 흐렸지만 비야 프랑카 데 몬테스 데 오카 까지 경치가 아주 멋져서 너무나 행복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정말 말 그대로 ‘등산’ 길이었다. 오르락내리락 오르락 오르락 급 오르락! 순례길에서도 힘든 여정으로 꼽혔던 첫날의 피레네 산맥에서도 이런 급경사는 없었는데. 눈앞이 몇 번 까매질 무렵 산의 능선 부근에 다달았다. 


  고도와 어울리지 않게 넓고 쭉 뻗은 능선을 조금 걷다 보니 ‘오아시스’라는 이름의 작은 휴식처가 나타났다. 지도상에 카페 표기가 되어있어서 설마 이런 곳 한가운데에 카페가 있는 건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은 탁자를 펼쳐놓고 초코바 몇 개와 과일 몇 개, 약간의 물을 파는 노점상이었다. 그나마도 이제 막 시작한 건지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 두 어명이 방금 도착한듯한 차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려서 진열하고 있었다.

 

   주변엔 두꺼운 통나무와 그루터기 같은 것들을 이용해 만든  의자와 식탁 비슷한 것들이 보였다. 따로 이용료가 필요하진 않을 것 같아 의자로  쓰이는 듯한 길쭉한 통나무 한쪽에 걸터앉아 전날 사둔 빵을 먹으며 발을 말렸다. 


   그 뒤로도 한참을 걸어서 산 후안 데 오르테가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벨로라도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많이 머무르는 곳이지만 전날 이곳의 숙소를 예약하려 했을 때 모두 Full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다음 마을로 숙소를 예약해둔 참이었다.(그리고 예약 직후에 이곳의 숙소들에 베드 버그가 창궐해서 한바탕 난리가 난 상태라는 최신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의 목표지점까진 1시간 정도의 거리가 남은 상황이라 조금 무리하면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먹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해서 작은 슈퍼 겸 바 앞에 자판기에서 작은 물 하나를 사고 그 앞에 앉아 잠시 발을 말리며 쉬었다. 오전부터 길을 걷는 동안 아침 일찍을 제외하곤 서로의 컨디션에 맞춰 각자 쉬고 싶을 때 알아서 쉬느라 거리가 벌어졌던 도현 씨를 다시 만났다. 지친 표정을 보며 내 얼굴도 저렇겠지 싶었다. 순례자끼리의 동지의식은 이렇게 생겨나나 보다. 나와 똑같은 험한 길을 걸었다는 동질감, 서로가 대견한 애틋함 같은 것들 말이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성당



다시 만날 갈림길


 잠깐 같이 걸어볼까 싶었지만 이내  우리의 갈길은 갈라졌다. 까미노의 길고 긴 여정은 오직 단 한 가지의 길로 이어져있진 않다.  거점이 되는 작은 마을이나 도시들을 연결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때론  한 도시에서 두 갈래 길이 갈라져 각각 다른 길로 가다 다음 마을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로 너무 험한 산길인  경우에 자전거나 사역 동물과 걷는 이들을 위해 조금 편평한 길이나 아스팔트 길이 까미노가 되기도 한다. 수백 년의 역사 동안 자연재해와 전쟁 같은 여러 가지 변수가 있었을 텐데 오직 편도의 한 가지 길만 존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 마주한 갈림길도 그런 갈림길이었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갈라져 내일의 마을인 부르고스에서 합쳐지는 두 갈래의 길. 나는 그중 남서 쪽 길로 3km 정도 더 가면 만날 수 있는 산토 베니오 오카라는 마을에, 도현 씨는 북서쪽으로 비슷하게 가면  나오는 아헤스라는 마을에 숙박 예약을 해둔  상태였다. 갈림길에서 잘 가라고 인사했지만 우리 둘 다 산티아고까지의 긴 여정에서 몇 번을 더 마주칠 것을 알고 있었기에(루트는 하나고, 사람이 하루에 걷는 거리는 비슷하므로) 가볍게 손을 흔들며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했다.




아스팔트 길 끝에서 만난 작은 마을, 산토베니아 데 오카.



  그렇게 혼자서 걷는 길은 정말  너무도 재미없고 무자비한 아스팔트 길이었다. 오전에 걸었던 나무 그늘 가득했던 오르막 산길이 그리울 정도로,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오후 2시의 딱딱한 길을 걷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몇 대의 자동차가 나를 지나쳐 쌩 하고 달려가는데 히치하이킹을 하고 싶은 생각이 울컥울컥 솟을 정도였다. 하지만 까미노 어플상으로 보이는 지도에선 나는 곧 있으면 목표지점에  도착한다고  알려주고 있었고, 그 말에 속아보기로 하고 이를 악물고 걸은 끝에 오늘의 목적지, 산토 베니오 오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알베르게는 한 두 개  정도인 것 같았고 슈퍼는 아예 없는 것 같은 정말 작은 마을이었다.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에 간신히 기어들어가니 나를 맞이하는 건 알베르게 주인이 아닌 산솔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었던 J  커플이었다! 분명 컨디션  조절한다고 조금씩 걸어서 나보다 조금 뒤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제 걷는 게 많이 익숙해져 조금씩 걷는 거리를 늘리고 계신다고 하셨다.

   

  혼자서 운영하느라 정신없는 알베르게 주인을 대신해서 J가 알베르게 안내를 간단하게 해 주었고 대충 먹은 점심을 보상하기 위해(?) J 커플, 미국인  R, 그리고 한국인 JJ와 L과 함께  알베르게에서 저녁 같은 점심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람들이 반갑고, 큰 산을 넘어온 피곤함에 와인과 맥주를 섞어 마셨더니 완전 꽐라가 되어 알베르게의 침대에 쓰러지듯 잠이 들어버렸다.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 https://youtu.be/K1-hXTZxb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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