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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Feb 26.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한 번째 날

나헤라-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 (21km)

 어둠을 걷는 순례자


 전날 체크인하고 가볍게 저녁 산책을 할 때까지만 해도 운치 있는 강변의 알베르게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주말 밤늦게까지 청춘을 즐기는 젊은이들의 소리에 제대로 잠을 못 자게 되니 번화가 모텔촌 한가운데 있는 작은 원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 준비하고 어제 슈퍼에서 사둔 과일과 빵으로 아침을 먹고 7시쯤 출발했다. 

  

 이른 시간은 아니었지만 해가 뜨지 않아 굉장히 어두웠다. 알베르게 문 앞을 나서자마자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아 어플의 까미노 지도를 보고 찾아가려다가 헤매는 모습을 본 주민이 "Peregrino(순례자)?" 하고 묻길래 그렇다 했더니 방향을 알려주었다. 그제야 그 방향에 도로 차선처럼 그려져 있는 노란 화살표가 보인다. 7시가 넘었는데도 도시가 깨어나려면 아직 까마득한 느낌이었다. 약간 무섭다는 마음으로 도시 외곽으로 향하자 더 무서워진다. 마을의 끄트머리부턴 가로등도 없는 산길로 이어지는데, 눈앞에 헤드랜턴의 불빛만 보이고 내 귀엔 내가 내쉬는 숨소리,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어두운 언덕길을 한참 오르내리다 조금 밝아지니 멋진 하늘이 드러난다.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난 숲의 벌레들은 내 헤드라이트 앞에서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그들을 쫓으려 손을 휘저으니 눈앞이 어두웠다 밝아졌다 한다. 벌레 탓을 하며 생각해보니 나야말로 그들의 잠을 방해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걸어오고 있다.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건 참 안심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밝아진 하늘 아래로 한참을 걸어 첫 마을 아조프라에 도착했다. 


햇살 아래로 멀리 보이는 아조프라 마을. 사실 이건 마을을 한참 지나 뒤돌아서 찍은 거다. 



우비, 입을 것인가 말 것인가!



  주로 순례자를 대상으로 하는듯한 바(bar)가 몇 개 보였지만 딱히 배고프진 않아서 그냥 지나치고 관공서로 보이는 건물의 담벼락에 걸터앉아 양말을 벗고 발이나 좀 말리려는 순간, 비가 오기 시작했다! 급하게 양말과 신발을 챙겨 건물 앞의 처마 밑으로 대피해서 잠시 비를 피했다. 금방 그칠 거라 생각해서 귀찮게 우비 꺼내지 않고 다시 길을 걷는데, 5분 정도를 걸어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우비를 꺼내서 뒤집어쓰고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적처럼 우비를 걸치니 비가 잦아들기 시작하고 조금 오다 말다 하더니 결국 멈춘다.


  날이 흐리면 일단 우비를 뒤집어쓰고 걷는 게 훨씬 낫긴 하지만 걷는 동안 땀이 나서 우비 안쪽이 습해지고 피부에 달라붙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비가 오는 게 아니라면 굳이 쓰고 가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언제든 뽑아 쓸 수 있게 배낭 뒤꽁무니에 달아둔 비옷은 그로부터 두어 번 정도 더 호출당하다 마침내 햇볕이 쨍하고 비치며 퇴근했다. 비 오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맑으니 더 좋았다.


배가 고파 피자와 오믈렛 두 개를 주문했다. 먹다가 중간쯤 인증샷을 찍어야겠단 생각에 급하게 찍었다. 


 넓은 평원 위로 난 오솔길은 끊임없이 오르락 내리막을 반복했고 동영상과 사진을 촬영하며 가다 보니 어느새 언덕 위의 마을 시루에나다.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 바 Bar에 가서 오믈렛 하나와 피자 1/4조각을 사서 어제 나헤라에서 같은 숙소에서 묵었던 한국인 P남매와 합석해서 먹었다. 선크림도 바르고 다시 재정비해서 얼마 남지 않는 길을 재촉했다. 오르막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오르막이 있었다. 하늘도 보면서, 내일 묵을 호스텔도 예약해가면서 간신히 산토도밍고(Santo Domingo)에 도착했다. 주일이었고, 가톨릭 신자로서  미사를 드려야 했는데 다행히 1시 미사 전에 마을에 도착했고 더 다행스럽게도 알베르게와 성당이 아주 가까운 위치였다.


도착, 그리고 미사


  체크인하고서 배정받은 침대에 거의 짐만 던져두고서 성당 가서 미사 드리려는데, 성당 안에 있지 않고 큰 문 앞에 서서 나무문에 새겨진 부조를 한참 동안 (당연하게도 스페인어로) 설명하시는 신부님과 신자들을 보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의 복음인, 돌아온 탕자에 관한 내용이었다. 언어는 다르지만 전 세계인들이 같은 순서와 같은 뜻으로 미사를 드리기에 가톨릭 어플의 매일 미사를 보며 그날의 복음을 따라가고, 다른 사람들이 모두 스페인어로 대답할 때 혼자서 한국어로 용감하게 응답하며 미사를 드렸다. 


  미사가 끝나고 멋진 파이프 오르간 연주와 성가대의 성가도 들었다. 성당 뒤편엔 산토도밍고 라 데 칼사다의 유명한 전설인 흰 닭 두 마리가 벽 안쪽에 들어가 있는 게 유리창을 통해 보였다. 아마도 살아있는 듯,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먹이는 어떻게 주는 건지, 산책시간(?) 같은 건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 알아낼 방도가 없어 그저 신비한 마음으로 조용히 동영상만 찍었다.




유튜브에 닭 두 마리의 전설에 관한 내용이 있습니다

>>>  https://youtu.be/7d4cNK0Yd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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