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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Feb 23.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 번째 날

로그로뇨-나헤라 (30km)



알베르게의 3유로짜리 아침식사. 토스트 한 개, 머핀 한 개, 오렌지주스 한 잔, 카페 콘 레체 한 잔.

  

 6시 반에 아주 간단한 아침을 차려먹고 씩씩하게 출발했지만 꽤나 큰 도시라 그런지 도시를 빠져나가는데만 1시간이 걸렸다. 아침에 먹은 카페 콘 라체(카페라테) 덕분인지 화장실이 너무 급해져서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라그라헤라 호수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을 찾아 헤매야 했다. 여느 등산로의 화장실들처럼 이용료 없이 입장할 수 있는 대신 전혀 깔끔하지 않은 비주얼이었지만, 당장 몸 안의 상황이 다급한 사람에게 그런 게 보일 리가 없다. 후련한 몸과 마음으로(?) 다시 등산을 시작했다.



십자가의 길

 

  누가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순례자들이 나무로  만든 작은 십자가를 꽂아두는 철조망에 닿았다. 오래된 가이드북에도 이 철조망 십자가에 대해 나온 것을 보면 최소 십 년은 훨씬 넘는 세월 동안 있어왔던 것 같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종교가 없거나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많이 걷는 길이기에 이 십자가를 만들어 철조망에 걸으며 다들 어떤 마음이었을지 잠시 궁금해졌다. 나도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십자가를 만들어 걸어보았다.


주변에서 구부러진 나뭇가지를 힘겹게 찾아 철조망에 가로 세로로 꽂아보았다


  여전히 길가엔 포도나무들이 가득하다. 몇 알 뜯어서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니 새콤함과 약간의 단맛이 올라온다. 당도가 높은 한국의 포도(캠벨)와  다르게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포도라  그런지 뭔가 맛이 미묘하게 달랐다.


  얕은 오르막 내리막을 반복하다 보니 나온 나바레테 마을.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마을의 특징 중 하나가 먼 곳에서도 잘 보일 가장 높은 곳에 성당이 있다는 것인데 과연 이곳도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성당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만든 길이니만큼 까미노 역시 마을의 성당 앞으로 이어진다..... 는 말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성당이 있다는 뜻이다....!



 

언덕(산...)위의 오래된 작은 마을, 나바레테.


  쉴 때 쉬더라도 올라가서 쉬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언덕을 다 올라가 성당에 들어갔다. 숨을 몰아쉬는데 어딘가 모르게 성스러운 느낌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울려 퍼져서 차분한 마음으로 스탬프도 찍고 방명록을 작성하고 나와서 성당 앞에 있는 작은 광장에서 발을 말리며 빵, 과자, 과일, 물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



 

리오하를 지나는 동안 과일 섭취 걱정은 1도 안 하게 만들어준 길가의 포도


지친 순례자의 낮술


  또 한참을 포도밭 사이로 걷다 벤토사 마을에  도착했다. 어제 같이 묵었던 J 씨 커플의 목적지는 이 마을이라고 들었다. 이미 해는 정오를 훌쩍 넘겨 도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쉬지 않고 바로 걸어야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해  쉴 수 있겠지만, 역시 상식적으로 10킬로미터의 거리를 더 가야 하는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쉬지 않고 가는 것 또한 무모한 일이었다. 본래의 까미노 루트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마을이라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찾아 들어가서 두 개뿐인 마을 식당 중 (그만큼 작은 마을이었다) 한 곳을 골라 들어가 역시 발을 말리며 오징어 튀김과 맥주를 먹었다. 오랜만에 낮술이라 그런 건지 땡볕에  지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한참 더울 때 쉬고 나서 그런지 더  가기가 싫어진다.


 레스토랑에선 선택할 수 있는 메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먹을만한 게 깔라마리(오징어). 조금은 느끼했지만 맥주와 함께라면 OK!

 

  애써 기운 내서 다시 길을 걷는다. 작은 포도알을 따서 한 알씩 먹으며 걷는 재미, 낯선 미국인과 이런저런 이야기(주로 왜 한국인들이 이 까미노에 이렇게 많은 것인가? 에 대한 의견교환) 나누며 걷는 재미도 다 떨어져 지칠 때쯤 나헤라가 나타났다. 



나헤라, 까미노를 걷는다는 것.


  7시에 출발해서 2시 40분 도착. 7시간 40분 만에 30km를 걸은 것이다. 몸이 너무나 삐그덕거려서 좀  편하게 쉬고 싶은데 알베르게의 스탭은 예약도 하고 비교적 일찍 도착한 나에게 2층 침대를 배정한다. 비어있는 1층 침대를 가리키며 여기 쓰면 안 되냐 물으니 안 된다고 말한다. 이유를 물으니 거기는 나이 든 사람들을 위해 비워놓는 거란다. 유 아 영 걸. 그래, 나이 드신 분들도 이 길을 많이 걷는 걸 보았다. 나는 젊으니까 다른 사람을 좀 더 배려해야지. 하지만 슈퍼마켓도 다녀오고 동네 구경도 하고 동네의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까지 먹고 돌아온 내 방의 1층 침대에는 나이 드신 분 대신 엄청난 냄새를 풍기며 코를 골고 자는 젊은 순례자가 있었다. 


  어차피 젊은이에게 줄 거라면 아까 나에게 주지 그랬냐고 따지고 싶은 생각도 울컥 들었지만, 그렇게 항의할 수 없는 짧은 언어 실력에 대한 비탄보다 빠르게 머리를 스치는 건 더 늦게 온 사람이라면 나이에 상관없이 더 힘들고 지친 사람일 거란 사실이었다.


 까미노를 걷는다는 것은, 일반 관광지처럼 버스나 기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고 굳이 두 발로 걸어서, 고난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잠과 식사는 최소한으로. 그 마음으로 걷는 순례자가 있기에 까미노에 있는 수많은 알베르게가 저렴한 가격으로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것이다. 따뜻한 물이 나와 씻을 수 있는 샤워시설과, 2층일지언정 등을 댈 수 있는 정도의 숙소라도 만족하고 길을 걷는데 집중해야 한다. 나는 그냥 여행객이 아니라 순례자이기에.  그리고 나보다 힘겨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사랑의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나는 그냥 순례자가 아니라 세상에 사랑을 가르치고, 그 사랑으로 산티아고, 야고보 사도를 이끌었던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걷기 시작한 그냥 '길'이었는데, 조금씩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유튜브 영상입니다 https://youtu.be/dtCfQDGw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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