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파 Apr 04. 2020

산티아고 가는 길 - 열여덟 번째 날

이테로 라 베가 -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22km)


별 끝의 도시를 향해


       눈을 떴을 땐 5시 반 이었다. 어제저녁 7시쯤에 잔 것 같으니 어제 늦은 점심 먹고 잤던 낮잠을  빼고도 거의 10시간을 잠만 잔 거다.  여전히 꿉꿉한 냄새가 가득한 욕실에서 씻고 나와 어둠 속에서 가방을 챙겨 방을 나와 건너편  방에 준비된 식탁으로 갔다. 다른 알베르게들에  비해 훌륭한 수준의 식사라곤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빵과 버터, 커피, 간단한 과일 등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한 게 대단해 보였다.(이미 이 숙소에 대한 나의 기대치는 바닥이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 ‘그러려니’하고 넘기는 아량이 가득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양치까지 하고 나니 6시 50분. 오늘도 천천히 출발해보자, 하고 나서자마자 엄청난 칼바람이 들이닥친다. 다급하게 옷을 더 여미면서 하늘을 바라보니 정말 별이 가득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별을 바라보는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수련회에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별을 좋아해서 천문 동아리까지 들어갔던 내 동생이 생각났다. 그 애가 이걸 봤으면 참 좋아했을 텐데. 남색의 하늘엔 은하수가 옅게 흐르고 있었고 나는 그 은하수의 끝을 향해 걷고 있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별의 땅의 성 야고보. 별을 따라간 자리에 있었다던 야고보 성인의 유해를 보기 위해 수백 년 동안이나 순례자들은  이 은하수 아래를 걸었을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별을  보며, 별을 향해 이 길을 걷는다.



흐리지만 아름다웠던 오솔길


      한참을 그렇게 걷는데, 점점 별빛이 옅어진다. 해가 뜨는 건가 싶었는데, 구름이 깔리고 있는 거였다. 밤새 차게  식은 길 위로 햇볕 대신 순례자의 신발이 닿는다. 해도  없는 데다 바람도 너무 세서 나는 최대한 빨리  걸었다. 몸에 열도 내고, 쉴 수 있는 곳까지 빠르게 갈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임기응변이었다. 평소엔 1시간에 4.5km 정도 걷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 새벽, 나는 시간당 5.2km를 걷는 기록을 세웠다. 


     보아디아 델 카미노에 도착해서 아직 정식 영업도 하지 않는 듯한 작은  알베르게 겸 Bar에서 블랙티를 하나 주문했다.  어제 이곳에서 묵은 순례자가 없는 듯, 주인은 나와 다른 두 명의 순례자가 바에 들어서니 그제야 어디선가 나타나 불을 켜고 주문을 받았다. 아늑하고 멋진 화장실에 들렀다가 작은 마당에 앉아 발을 말리며 차를 마시려고  했는데  날이 추워서 그런지  발이  얼어붙을 것 같았다. 따뜻한 햇볕 아래서 뽀송하게 말리고 싶었지만 한 겨울 동해의 황태덕장처럼 동결 건조될 내 발이 걱정되어 조금만 말리고선 바로 일어나 길을 떠났다. 다시 속도를 높여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아침에도, 조금 전의 바에서도 배가 아프지 않았다. 조금 걷고 생수를 마시고 푹 쉰 게 효과가 있었던 걸까? 일단 내일까지 두고 보고 완쾌여부(?)를 결정하겠다고 생각했다.  




당황스러운 도시, 프로미스타


     평원 사이의 예쁜 오솔길을 한참 걷다 보니 운하 하나가 나타나고, 까미노는 그 옆으로 이어진다. 넉넉하게 보면 왕복 4차선 도로의 폭 정도 되는 운하였는데, 날씨가 좋아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비쳤다면 더 예뻤을 거란 생각이 들어 조금은  아쉬웠다. 그  운하를 쭉 따라가다 나오는  도시가 바로 프로미스타다. 며칠 전 오르니요스에서 만난  다른 순례자가 프로미스타는 정말 볼 게  없는 도시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 말 때문인지,  과연 프로미스타는 이제까지 걸었던 다른 까미노의 도시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오래된 중세의 느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최신 도시의 번쩍번쩍한 느낌도 아닌, 뭔가 어정쩡한 황량함이 마을에 가득한 듯했다. 하지만 명색이 도시였기에, 발을 말리고 쉬어갈 바는 꽤 있었다.


 

프로미스타의 바에서 먹은 스페인식 오믈렛 또르띠야. 순례길의 시그니쳐 아침밥이다.


      규모가 조금 큰 바에 들어가 오믈렛 하나를 먹고서 짐을 챙겨 씩씩하게 다시 걷기 시작하는데  1분도 안되어서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따라 나온다. 나를 애타게 부르길래 왜 그러나, 하고 바라보았지만 스페인어로 무언가 열심히 말할 뿐, 내가 아는 단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당황한 표정을 한참 살피던 나는, 그제야 내가 바에서 계산을 하지 않고 나왔음을 기억해냈다. 주인보다 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쏘리’와 ‘페르돈(미안합니다)’을 연신 외쳐가며 다시 바로 돌아가서 허겁지겁 계산을 하려고 지갑을 열어 다급하게 동전을 털고 있으니 그 모든 상황-당당하게 나간 계산 안 한 순례자와, 혼자서 가게 보고 있다가 놀라 뛰쳐나간 주인-을 지켜보았던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손님들이 나를 보며 마구 웃고 있다. 마주 웃어주기엔 내가 벌인 실수가 좀 큰 편이라 겸연쩍게 웃어 보이고, 괜찮다며 씩 웃어주는 주인에겐 연신 스페인 사과로 ‘페르돈’를 외치며 한국인의 사과로 고개를 숙였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출발. 출발 5분 만에 장갑이 없어진 걸 발견했다. 아까 그 바에서 없어진 것이 분명했지만 다시 가기엔 귀찮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그냥 걷기로 했다.




지평선 끝까지 구름이 가득히 보이는 맑은 날씨



     그 뒤로는 계속 차도 옆으로 걷는 길이었다. 다행히 아스팔트는 아니고 흙과 모래가 잘 다져진 길이라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조금 지루하다 싶은 길이었지만, 완전히 개어서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어서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1시 50분경, 나는 지칠 대로 지쳐서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Bar를 겸하고 있어서 그곳에서 체크인을 해야 했는데, 혼자 일하는 주인은 몹시 정신없어 보였다. 구석에서 음식을 먹던 낯익은 얼굴, 한국인 H를 다시 만나 인사를 하니 ‘패스뽀트’ 한마디 외치고 바쁘게 돌아다니는 주인을 대신해 그가 알베르게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체크인을 끝내고서 침실로 안내받아 내 침대  하나를  찜꽁해두고 샤워, 빨래를 모두 끝내고 다시 바로 돌아와서 참치와 올리브가 올라간 타파스와 계란 하나를 시켜 맥주와 함께 먹었다.






미사를 하지 않는 성당



   마을 구경을 갔는데, 마을에 하나 있는 성당에 주일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오래된 성당이라 관광용으로 입장료를 받고 개방하며, 그나마도 내가 갔던 시간인 3~4시쯤엔 시에스타로 개방하지 않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숙소로 돌아와 한숨 자다가 다시 가서 (중간에 크레덴시알 안 가져온 게  생각나서 한번 더 갔다 왔다) 어슬렁거리고 있으려니 같은 숙소에 묵는 H도 성당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작은 나무문 앞에 서서 오픈 시간까지 기다리는데도 문을 안 열길래 뭔가 잘못되었나 싶어 성당 주변을 빙 잡아 도는데, 반대쪽 문이 열려있었다. 크레덴시알을 제시하니 페레그리노 세일을 받아 1유로로 입장할 수 있었다. 성당은  화려하지만 약간은 황량한 느낌이었다. 돌기둥의 투박하게 하얀 모습이 참 좋으면서도 뭔가 쓸쓸했다. 어쩌면 신자들의 온기와 신앙을 담고 있어야 하는 오래된 건물이 그저 유적으로만 관리되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돌아와 잠시 멍 때리다 알베르게의 바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수프는 약간 비렸지만 소고기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와인은 아마 하프 보틀 정도 되는 1 Jar를 받았는데 속이 여전히 안 좋은 건지 다 마시진 못했고, 후식으로 나온  과일은 조금도 신선하지 않아 반쪽만  깎아먹고 말았다.


엄청나게 아름다웠던 노을. 휴대폰 카메라론 다 담기지도 않는다.




    저녁 먹고 나와 산책 겸 마을을 둘러보는데 낮은 건물들 사이로 슬쩍 보이는 노을이 너무 예뻐서 홀린 듯이 마을 외곽 쪽으로 나있는 도로로 나갔다. 순례자를 제외하면 오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작은 마을의  끄트머리에서 모난 것 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평원 너머로 사라지는 황금빛 태양을 바라보면서, 옛날의 스페인 사람들을 생각했다.  서쪽에 황금의 나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게 과대망상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쪽 하늘 전체를 누렇게 물들이고도  남을만한 황금이 정말, 저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노을을 마음껏 보고 돌아오는 길, 물 하나를 살까 생각하며 알베르게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낡은 자동판매기에 1유로를 넣고 500ml짜리 물 버튼을 누르니 아무런 소식이 없다. 전통(?)적인 방법으로 자판기를 흔들고 때리고 버튼을 다시 여러 번 눌러도 아무 소식이 없다. 내 돈을 먹은 거다. 알베르게의 1층 바에 들어가서 하소연하니 직원이 찬찬히 듣다가 카운터에서 1유로를 꺼내 준다. 어차피 여기도 물을 판대서 하나 사려고 했더니 1.5리터짜리 1.5유로로 판다고 한다. 받은 1유로와 지갑을 탈탈 털어 동전을 긁어모으니 1.4유로밖에 없다. 지갑 구석에 끼어있는 동전이라도 찾으려고 박박 긁고  있으려니 직원이 나를 부른다.


  -이봐 , 이름이 뭐야?

  -나는 그라시아.

  -나는 하비에르야.

  -?

  -만나서 반가워. 그라시아. 그 물은 그냥 가져가.

  -???왜??


노을만큼이나 따뜻한 얼굴로 씩 웃으며,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땡큐 하비에르, 그라시아스!





유튜브에 영상도 있습니다!

>>>> https://youtu.be/PHphj32Tq5k




이전 14화 산티아고 가는 길 - 열여섯 번째 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