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얄카사르 데 시르가 - 칼사디야 데 라 쿠에자 (23km)
5시 반에 일어나서 준비하고 숙소를 나선 시간은 6시 반. 어제보다 빠른 시간이라 그런가 하늘에 별도 엄청 많았다. 하늘을 바라보며 걷다가 몇 년 만에 별똥별도 봤다! 별자리 이름을 많이 아는 건 아니었지만 어쭙잖게 알고 있었어도 이렇게 수많은 별들 틈에서 제대로 별자리를 읽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건 왼쪽 뒤통수 쪽에서 어른거리는 오리온자리와 정면 약간 오른쪽에서 빛나는 북두칠성뿐.
넋 놓고 별만 보고 걷다 보니 조금 추운 느낌이다. 발걸음을 조금 서둘러서 아직도 어둠 속에 잠긴 도시,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에 도착했다. 문 연 바를 찾아 헤매다가 광장 옆에 있는 큰 바에 들어갔다. 화장실 먼저 갔다가 나와서 블랙티와 파운드 케이크, 봉지에 든 빵 하나를 샀다. 뭔가 그럴듯한 아침은 아니지만 빈속으로 한 시간을 걸었기에 간단한 요기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주로 밤 영업을 하는 듯 아침 메뉴도 거의 없고 조명이 어두웠던 바에서 나오니 어슴푸레 밝아진 도시가 보인다. 많은 순례자들이 묶는 도시고 역사가 오래된 도시라 걷는 걸음걸음 보이는 건물들은 고풍스럽게 멋있었다.
구시가지를 빠져나가기 직전, 왠지 내 마음에 드는 분위기의 작은 바 하나를 더 발견했고, 아쉬웠던 아침을 마저 해결하기로 결정했다. 뭔가 현지 주민들의 왁자지껄한 아침 느낌이 물씬 풍기는 바에서 또르띠야 하나 시켜서 먹는데 엄청 맛있었다! 3주째 길을 걸으며 많은 또르띠야를 먹었는데 산 솔 (Sansol)에서 먹었던 것 이후로 가장 맛있는 또르띠야였다. 순식간에 오믈렛을 해치우고 빵은 가방에 챙겨서 다시 출발했다.
아침밥을 먹는데만 1시간 정도를 소비해서 이미 하늘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고, 그렇게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되어버린 도시, 카리온을 벗어났다.
시 외곽에 엄청 크고 멋진 오래된 건물이 있길래 봤는데, 호텔 건물이었다.(그것도 별이 4개나 되는!) 참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호텔이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이드북을 다시 보니 예전에 수도원이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어느새 많이 밝아져서 휘적휘적 걸어가는데 여전히 구름이 너무 짙었다. 보통은 걷고 한두 시간 정도 지나면 더워져서 겉옷을 하나씩 벗곤 했는데, 오늘은 해가 나오려면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아 두꺼운 옷을 계속 껴입고 있었다. 로마 때부터 있었다는 오래되고 편평하고 쭉 뻗은 멀고 먼 길. 앞으로 17Km 동안은 도시나 마을이 없는 길이다. 굳이 한 마을에서 바를 옮겨가면서까지 아침을 두 번씩이나 먹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식당이나 바를 찾을 수 없는 길이기에, 아침을 든든히 먹고 간식을 적당히 준비해야 했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없이 광활한 평원 위로 그저 쭉 뻗어있는 길이다. 바는 없더라도 최소한 벽이나 지붕 달린 뭔가라도 있으면 잠시 앉아 쉴 계획이었는데 그런 것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지쳐가는 와중에 멍 때리며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급기야는 먹고 싶은 한국 음식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푸석푸석한 스페인 쌀이 아닌, 쫀득한 흰쌀밥에 아삭함이 살아있는 한국 김치, 단짠의 조화가 환상적인 짜장면....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주로 그런 것들이었다.
구글 지도로 확인해보니 전방 어딘가에 오아시스라고 이름 붙여진 작은 바가 있다고 나온다. 산 후안 데 오르테가 가는 길에서 봤던 것 같은 노상 카페일 것 같지만 최소한 앉아서 발 말릴 수 있는 의자는 있겠다는 생각에 기운 내서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오래된 석조 벤치와 테이블이 길 옆의 공터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지만, 가뜩이나 흐린 날씨에 이끼가 가득 끼어있는 습한 의자에 앉고 싶진 않아서 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그곳을 지나쳐 걸었다.
10시가 되었을 무렵 오아시스라는 바에 도착했는데, 이름과는 다르게 야전 식당 느낌이었다. 조리대가 야외에 있는데 여러 음식들을 썰고 조리했던 흔적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도마와 칼을 세척하진 않는 듯했다. 한쪽에선 소시지를 바비큐로 굽는 그릴이 있었는데 일부러 훈제 중인 건지, 불이 꺼진 건진 알 수 없었지만 회색 연기가 무럭무럭 올라오는 모습을 보니 그 옆에 있다간 조만간 일산화탄소 중독이 걸릴 것 같았다. 샌드위치라도 하나 사서 먹어볼까 했던 생각을 고이 접고 블랙티 하나 시켜서 (뜨거운 블랙티를 얇은 플라스틱 컵에 담아서 주길래 나는 또 기겁하고 말았다) 아침에 샀던 빵과 함께 먹으며 발가락을 말렸다.
내일 묶을 숙소를 전화로 예약하면서, 또다시 쭉 뻗은 지루한 길을 걸었다. 오늘의 숙소는 예약을 하지 않은 상태라, 너무 늦게 가면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리를 재빨리 놀려 다행히 너무 늦지 않은 시각에 칼사디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면서 공립 알베르게 앞에 알록달록한 사람의 모습이 가득해서 혹시 벌써 저만큼 줄 서 있는 건가 싶어 놀라서 다가갔는데, 다행히 사람은 아니고 동키로 배달 온 배낭들이 그 주인들보다 먼저 도착해서 차에서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베르게에는 생각보다 자리가 많았고 나는 2층 침대를 배정받아 짐 풀고 샤워와 빨래를 끝내고 나와서 작은 바에 갔다. 늦은 점심으로 라비올리와 맥주를 시켜 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짧은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는데 어디선가 아련히 한국말이 들리고 짜파게티 냄새가 나서 일어났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내 주변의 침대에 한국인들이 묶는 건 분명해 보였지만 전자레인지 돌리는 것 이상의 조리는 불가능한 1층의 식당에도 그들의 모습도, 짜파게티도 보이지 않았다. 허기와 향수가 만들어낸 허구의 냄새인가 싶은 민망함을 접어두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20분이면 마을 구경을 끝낼 수 있을 정도였고 몇 개 없는 알베르게와 식당을 돌아보며 오늘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고심해보았다. 모레의 숙소를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하며 걸은 곳은 마을 살짝 외곽의 오래된 수도원 느낌 나는 건물이었다. 뭔가 구경할 거리가 있을까 해서 가까이 가봤더니 수도원이 아닌 폐쇄된 공동묘지였다. 마을에서 살짝 떨어진 언덕이라 노을을 보러 오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너 시간을 살짝 넘겨 간 식당에선 몹시 유쾌한 사장님이 발랄하게 돼지 뺨 고기를 추천해주셨고 다행히 한국인들이 앉은 테이블에도 합석할 수 있었다.
몇 번을 쉬엄쉬엄 걸었더니 전에 만났던 한국분들과는 이제 거리가 벌어진 듯, 테이블에 있던 분들은 처음 만나는 분들이었다. 나보다 2-3일 뒤에 출발한 분들이었는데 그 전과 비슷한 페이스로 걸었다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쯤에 나 마주쳤겠지만 내가 강약 중강 약으로 걷는 통에 이렇게 후발 그룹(?)과도 조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쾌하고 발랄한 사람들 틈에서 즐겁고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또 노을이 엄청나게 아름다워서 식사 멤버 중 두 명과 같이 노을 구경을 나섰다. 오후의 산책길에 찜콩 해 둔 노을 포인트를 마치 내가 사는 마을 인양 수줍게 안내하며 이런저런 이야기와 노을을 배경으로 하는 (얼굴은 안 나오는) 실루엣 사진을 찍으며 좋은 시간을 보냈다.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 https://youtu.be/hne8jEXW3k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