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페라다-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24km)
산행 뒤에 유적지 탐사까지 하고 와인에 맥주까지 마시고 잠들었던 탓인지 잠자는 내내 너무 더워서 계속 깼다. 옆의 2층 침대에서 자던 순례자는 내가 화장실만 두 번을 넘게 갔다. 나 같았으면 귀찮아서 참을 텐데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5시 40분에 일어나 어제 늦게 들어와 불 켰다고 눈치 준 옆 1층 침대 순례자의 눈치를 보며 짐가방을 싸서 방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호스텔의 1층 식당 구역에선 간단한 조식을 팔고 있었지만 어제 사둔 크로와상과 바나나로 아침을 먹고 양치까지 하고서 6시 50분쯤 길을 나섰다. 어제 산 새 스틱을 처음 개시했는데 안 쓰다 쓰려니 영 어색하고 조용한 도시에서 탁탁거리는 스틱 소리가 나는 게 신경 쓰여 스틱을 접고 조용히 걸었다. 어제 커피를 마셨던 엔시나 성당 근처 광장에서 방향을 살짝 헤매고 있으니 먼저 계단 쪽으로 내려간 한국분이 이쪽이라고 알려주신다. 그쪽으로 내려가서 보니 조금 앞서 걷던 그분도 그다음 길을 몰라서 헤매고 계셨다.
어제 성당기사단의 주랑 위에서 보았던 실 강 위의 다리를 지나 작은 주택단지 쪽으로 걸으며 생각보다 춥진 않길래 후드를 벗었다. 어제 이것저것 짐을 늘려서 가방이 무거워져 걷기가 힘든 건가 생각이 들어 허리를 숙여 가방 끈들을 다시 꽉 조여서 몸에 밀착시켰는데도 어딘가 불편하다. 아, 어제 내리막길 때문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제야 퍼뜩 들었다. 스틱도 없이 테이핑도 안 하고 그 내리막을 걸었으니 이렇게 되는 건가 싶었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앞서가는 사람들을 손에 익지 않은 스틱까지 써가며 따라가려니 여간 벅찬 게 아니다. 굳이 따라가야 하는 건 아니지만 새벽이라 길이 어둡고 헤드랜턴을 꺼내 머리에 끼우기도 귀찮을 땐 남들 따라가는 게 최고니까. 새벽 공기가 걱정돼 너무 껴입은 건지 체온은 점점 올라갔고 습한 날숨을 내뱉으며 걸으려니 힘들고 짜증이 나기 시작해서 걷는 속도가 처지고 앞서 걷던 다른 순레자들과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교외의 주거단지 쪽을 지나려는데 했는데 표지판을 잘못 읽어 마을 깊숙이 들어가 살짝 헤매고 말았다. 바로 지도를 꺼내 맞는 길을 찾아보는 대신, 아직 깨어나지 않은 마을 가운데에서 조용히 머무르는 기분이 좋아서 천천히 걸어보았다.
어느새 해가 뜬 건지 하늘이 많이 밝아졌다. 다만 구름이 짙게 깔려있어 일출은 전혀 보지 못한 채 어둡기만 한 콤포스티야를 지나 푸엔테 누에바스에 가서야 두 번째 아침을 먹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좀 더 걷다 보니 빗방울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한다. 마을 끄트머리쯤의 예쁜 포도밭을 지나는데 빗방울을 보며 우비를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스럽게 걸어서 그런지 주변의 풍경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을 빠져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와인 협동조합을 만났는데 와인 시음과 작은 핀초를 1.5유로에 판다는 입간판에 낚여 들어가 보았다. 와인 공장과 판매를 겸하는 양조장이어서 한쪽에선 기게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온 아저씨 순례자 한분이 작은 테이블 겸 드럼통 옆에서 와인 한잔 하며 마치 주인처럼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처럼 와인 시음하러 들어왔다가 입에 맞으셨는지 와인 몇 병을 집으로 택배 주문하고 있었다. 아마 같은 유럽권역이라 배송도 빠르고 배송비도 많이 청구되지 않아서 가능한 게 아닐까. 나도 주문하고 싶었지만 와인 값보다 배송료가 더 어마어마할 것 같아 와인을 홀짝이며 나무 궤짝에 뽁뽁이로 감싼 채로 들어가는 남의 와인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작은 와인잔에 두 모금 정도 분량으로 주신 와인은 무료였다! 애초에 약간의 돈을 지불할 의사도 있었지만, 그 마음이 고마워서 동전이 몇 개 들어있던 작은 그릇에 1유로 정도를 넣고 나왔다.
와인 공장을 나오니 바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어지는 파란 육교를 넘어 길을 지나니 또 비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우비를 쓸까 하다가 그냥 가방에 방수커버만 씌우고 다시 걸었다. 이곳의 비는 예상하기 참 어렵다. 계속 올 것 같아 우비를 뒤집어쓰면 금방 그치고 짧게 올 것 같아 우비를 안 쓰면 한참을 비가 오곤 했으니. 다행히 이번의 직감은 맞아서 하늘은 곧 맑아졌다. 구름도 적당해서 걷기 딱 괜찮은 날씨가 되었다. 기분 좋은 날씨에 슬슬 걷다 보니 어느새 해는 더 쨍해지고 오늘의 목적지까지 가기 전 마지막 마을, 카카벨로스다.
구글 맵에 문어요리가 맛있다는 집에 갔는데 역시나 이른 시간이라 (요리를 만드는) 주방은 닫혀 있고 바만 영업 중이라 조금 더 걸어가 마을 가운데쯤 있는 바 겸 알베르게에서 스파게티와 맥주 하나를 시켜 먹었다. 잠시 발도 말리면서 오늘도 2시 전에 알베르게 들어가기는 글렀구나 싶은 생각을 하며 잠시 쉬다 길을 나섰다.
비야프랑카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아일랜드 아저씨 순례자와 마주쳤다. 나보다 살짝 앞서서 걷다가 급경사 오르막 직전에 잠깐 선 채로 쉬더니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슬쩍 같이 걸으며 이것저것 말을 건다. 아마도 505번째로 듣는 ‘한국인들이 왜 이렇게 많이 걷고 있는 거냐’라는 질문과 오늘 어디까지 가냐 하는 그런 질문이었다. 오르막이라 숨이 차기도 했고 혼자 걷고 싶은 마음도 커서 대충 대답하고 속도를 높여 빠르게 걸어버렸다.
오르막 높은 곳에 올라서니 쭉 이어진 내리막길 저 멀리 비야프랑카로 추정되는 도시가 보이고 도로 옆으로 나 있던 길은 어느새 산길 같은 오솔길로 빠진다. 한번 마을 맛(?)을 봐서 그런지 도착은 더욱이나 기약이 없다. 사막에서 저 멀리 오아시스가 보일 때 이런 기분일까 싶다.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커지지 않는 먼 상을 바라보며 걸어야 하는 고통, 희망고문 같은 것 말이다. 오르막을 오를 대로 오르고 나니 마을까지 들어가는 길은 또 하염없는 내리막이다. 이틀간의 스틱 없는 산행 덕에 삐그덕거리는 관절들을 붙잡고 15분 정도 내려가서 다행히 너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의 숙소를 찾았다.
체크인과 샤워, 빨래를 마치고 마을이 작으니 천천히 구경해도 되겠다 싶어 엎어져서 멍 때리며 일정을 짜다 계속 간지럽던 팔꿈치를 들여다보았다. 모기 물린 자국보다 좀 작은 자국 몇 개가 점점이 이어져있는데 사진을 찍어 선배 순례자들이 있는 단톡방에 올려 물어보니 역시 베드 버그가 맞다는 답변이 올라왔다. 대체 어디서 물린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는데, 유일하게 짚이는 게 그저께 폰세바돈에서 자면서 침낭을 꺼내기 귀찮아 숙소에 있던 담요를 덮고 잤던 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 2층 침대가 베드 버그가 서식하기 아주 좋은 나무침대였던 것도.... 물론 진실은 알 수 없다. 짐작만 남았을 뿐.
숙소를 나와 마을 광장에서 커피 한잔과 타파스 몇 개 먹고 일어나 마을 한쪽에 있는 약국에 가서 말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자국을 보여주니 고개를 끄덕하고는 바로 약을 내어준다. 먹는 약과 바르는 약을 모두 달라는 손짓과 몸짓을 해서 약을 받아 계산하고 (말을 못 알아들을 것 같았는지 계산기에 11.67을 적어 나에게 보여주었다) 본격적인 마을 구경에 나섰다.
예능 <스페인 하숙>에도 잠깐 나왔던 산 니콜라스 성당에 들어갔다.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해서 굉장히 멋있었지만 미사가 없어 뭔가 알맹이가 빠진 느낌이었다. 아쉬운 마음으로 성당을 끼고돌아 옛 수도원 건물 쪽으로 들어가니 <스페인 하숙>에서 많이 봤던 익숙한 알베르게 입구 겸 마당이 나온다.
오래된 알베르게를 살짝 손을 봐서 짧은 알베르게 영업을 했던 예능 프로그램 덕분에 이 순례길은 한국사람에겐 더 유명해졌고 그 이야기는 한국인뿐 아니라 왜 한국인이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 많은지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처음 보는 외국인 순례자가 '너도 코리안 TV쇼 보고 순례길 온 거냐'라고 물을 정도였으니까.
이미 반년이 넘게 지나 촬영팀은 당연히 철수했고 알베르게 영업을 했던 건물은 다른 사람이 알베르게로 운영 중이었다. 식사를 제공했던 예능 프로그램과는 다르게 이 알베르게는 다른 많은 알베르게들처럼 오픈 키친이었고 2층 침대가 있던 촬영과는 다르게 전부 1층 침대로만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도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알베르게라, 나처럼 이 알베르게에 묶지 못해도 구경 오는 한국인들이 많은지 알베르게 문에는 ‘숙박객만 입장 가능’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멀찌감치 가볍게 구경하고 숙소에 머무르는 낯익은 한국인들 몇 명과 가볍게 안부인사를 나누고 혹시라도 주인이 나타날까 재빨리 알베르게를 나왔다.
큰길을 걷다 보니 길 끝에 커다란 성당이 보인다. 이곳은 다행히도 미사가 계속 열리고 있다고 한다. 안에 들어가 보니 하얀 돌을 쌓아 다듬은 내부에 큰 스테인드 글라스 햇볕이 들어와 따뜻하고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사가 있고 사람들이 계속 돌보는 공간이라 더 그렇게 보였을까? 성당을 한 바퀴 돌고 나와 작은 개천 같은 강가를 조금 구경하고 오래된 귀족의 집들이 있다는 아구아카예에 가서 옛날 귀족들의 집을 좀 구경했다.
아까 약을 샀던 약국 근처에 있던 마트에 가서 바나나와 맥주, 물을 사고 조금 더 걸어서 마을 구석에 있는 빵 맛있다는 상점을 찾아갔는데 바게트 같은 딱딱하고 큰 빵만 가득하다. 난 첫 번째나 두 번째 아침으로 간단하게 먹을 만한 작고 달달한 빵이 필요해서 나폴리탄이나 크로와상 같은 빵은 없냐고 물어보니 없다고 한다. 눈물을 머금고 다시 한참 골목길을 걷고 헤매 중앙광장 쪽으로 나와서 몇몇 상점에서 가격을 보고 괜찮아 보이는 나폴리탄 빵 하나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 주인에게서 가위를 빌려 이틀 뒤 하산길에 다리에 붙일 테이핑을 미리 잘라놓고 저녁밥으로 엊그제 산 중국식 우육라면을 끓여 맥주와 함께 먹고 빨래 정리 등등을 마치고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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