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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r 28. 2021

산티아고 가는 길 - 스물여덟 번째 날

비야프랑카-오세브레이로(30km)

눈을 감은 채 걷다



  9시쯤 잠자리에 든 것 같았는데 11시쯤 내 침대 바로 옆의 남자화장실에서 짙게  풍기는 인간의 향기(?)에 잠에서 한 번 깬 것을 제외하곤 5시 반까지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 처음엔 피곤해서 푹 잤나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제 먹은 베드 버그 약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몽롱한 상태로 씻고 가방 싸고 1층 내려가서 어제 사두었던 빵과 바나나를 우걱우걱 먹고서 짐을 챙겼다. 


빵과 바나나와 생수. 간단한 첫번째(?)아침. 마을 한쪽에 있던 거리 표지판. 산티아고까지 200km 남아있다고 알려준다




  오늘은 긴 산길을 가는 날이라 동키로 배낭을 보내기로 했다. 버클끼리 잘 조여놓고 방수커버까지 씌운 배낭 한쪽 고리에 돈이 든 봉투를 매달아 알베르게 입구 쪽 한쪽에 세워두었다. 전날 미리 사둔 아침거리를 꺼내서 먺으며 슬쩍 식당 쪽을 보는데 아침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토스트, 머핀, 바나나 등등이 화려하진 않은 식탁에 잔뜩 있었고 어제 체크인할 때 아침 식사가 3유로라고 들었으니 3유로 무한리필 뷔페(?)인 셈이다. 여태까지 묶었던 알베르게의 데사유노(아침) 중에선 최고의 가성비인 듯 싶었다.



  6시 40분쯤 나와서 걷기 시작했다. 걱정했던 것만큼 춥진 않았은 새벽이었지만 더 걷다가 산에 가면 더 추워질지 모르는 길이라 긴장을 늦추진 않았다. 원래는 마을을 나서는 갈림길에서 산으로 향하는 길로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막상 그쪽으로 가려고 보니 길이 너무 어둡고 별이 안 보일 정도로 흐린 데다 해가 뜰 때까진 시간이 한참 남아 있어 풍경을 보며 걸을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산길을 가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을 바꿔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루트를 선택했다.  





그나마 밝아져서 찍은 등 뒤의 동쪽. 해가 조금씩은 뜨고 있나 보다



  가로등도 없는 비야프랑카의 외곽 도로는 좀 무서웠다. 어디선가 강이 흐르는 소리는 우렁차게 들리는데 보이는 건 내 발 바로 아래와 앞서가는 순레자의 랜턴 빛뿐. 그래도 혼자 걷고 있진 않아서 다행이었다. 약기운에 잠은 계속 쏟아져서 자는 건지 걷는 건지 비몽사몽 한 상태로 꿈결처럼 걷다가 작은 마을 하나는 지나치고 그다음 마을 트라바델로에 가서 두 번째 아침을 먹었다. 이제부터 산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라 그런지 메뉴가 싼 편은 아니었다. 또르띠야 하나와 카페 콘 레체가 3.9유로였으니... 길을 지나는 순례자들이 모두 이곳에 온 듯 바 안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붐벼서 혼자 앉은 이탈리아 순례자 한 명과 합석해서 아침을 먹고 양말도 살짝 말리고 화장실도 갔다가 다시 출발했다.


 그 뒤로도 몇 개의 마을을 지났지만 보슬비와 흐린 날씨, 약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꿈속을 걸은 것 같은 아스라한 기억만 남아있다.

 

   베가 데 발카르세에 도착했을 땐 배는 안고픈데 조금 춥고 비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바에 들어가서 카페 콘 라체 하나만 시켜서 먹고 잠깐 쉬었다. 미스트 같은 비가 흩날리는 길을 반쯤 흩어진 정신을 부여잡고 계속 걸었다. 마을 길은 어느새 산으로 이어지고 산 길은 어느새 숲 속 어딘가로 구뷔구뷔 이어진다. 시야는 점점 좁아져 나무나 하늘은 보이지도 않고 그저 발 밑의 젖은 나뭇가지와 나뭇잎들만 간신히 구분해가며 걸었다. 체력은 점점 떨어지고 조금씩 배도 고파와서 아까 들렀던 마지막 카페에서 뭔가 씹을 거리를 사지 않고 커피만 사 마셨던 게 새삼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목장을 주업으로 하는 듯 소똥 말똥 냄새가 굉장한 작은 마을에 이르렀다. 간단하게라도 요기를 하려고 바와 레스토랑을 구글 맵으로 찾았는데, 햄버거가 맛있다는 집은 문을 닫은 상태라 그 근처의 작은 바에 들어가 스페인식 샌드위치, 보카디요를 하나 먹었다. 없는 힘을 있는 대로 쥐어짜서 오르막을 오르고 올라 2시 반, 출발 7시간 50분 만에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했다.



멀리 내가 지나온 마을이 보인다. 산 너머 더 멀리 보이는 게 설마 출발했던 동네일까?








  당장 쓰러질 것 같이 피곤했지만 할 일은 해야 했기에 체크인하자마자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슈퍼에 가서 빵과 물을 샀다. 산 꼭대기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슈퍼라 그런지 물가가 정말 어마어마했다.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잠깐 자고 나와서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다던 산타마리아 성당을 보고, 올라왔던 반대편 쪽의 산 능선들을 구경했다. 아마도 내일 내려갈 길이라 더 암담했던 것 같다. 그나마도 추워서 오래 구경하진 못하고 적당히 포기하고서 근처의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유명하다는 뽈뽀 요리가 먹고 싶었지만 그것만 먹기엔 배가 고플 거 같아서 뽈뽀와 순례자 디너(코스요리)를 다 시켰다. 먹다가 남겨도 좋다 생각하며 시켰던 건데 역시 내 허기진 위장을 과소평가했던 듯 주문한 요리들은 빵가루 하나 남지 않았다.



갈리시아 특산(?) 품 뽈뽀 요리. 푹 익힌 문어가 잘 씹히고 맛있었다.




 올리브유에 볶듯이 구운 뽈뽀에 파프리카 가루 같은  매콤한 가루를 조금 뿌린 요리였고 바게트와 함께 먹으니 간도 적당하고 딱 맛있었다. 순례자 메뉴로 나온 메뉴 중 갈리시안 수프는 어딘가 약간 아욱 된장국 느낌이 물씬 풍겼고 스테이크는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처음 먹어본 산티아고 케이크는 스펀지케이크와 파운드 케이크의 중간 정도 되는 식감과 맛이었고 나쁘진 안았다.



  걷던 길 저 너머로 사라지는 달과,  더 먼 곳에서 사그라드는 노을을 한참을 바라봤다. 몇 번을 마주쳤던 YR, SH가 발이 불편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내가 묶는 알베르게로 데리고 가서 종아리와 발에 테이핑을 해주었다. 고된 길을 걸었던, 그리고 내일 역시 고된 길을 갈 그들이 조금은 편하길 바라며.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74LC6a0vz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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