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가데- 곤자르(18km)
5시 40분 알람에 눈을 떴다. 다른 순례자들이 깰까 황급히 알람음을 줄이며 오늘도 많이 걷지 않는 일정이니 6시까지 조금 더 자볼까 꿈틀대다가 내가 묶는 층에 욕실 겸 화장실이 한 개뿐이었던 게 생각나 10분 만에 침대를 박차고 나와 씻고 준비했다. 일찍 일어난 나를 제외한 다른 순례자들이 모두 열심히 (코를 골며) 자길래 최대한 빠르게 가방에 짐을 밀어 넣고 1층 거실 한쪽 구석에 앉았다. 공복에 걸을 순 없으므로 어제 챙겨둔 빵 2개에 버터를 찍어 뜯어먹고 화장실도 한번 들렀다가 양치까지 마쳤다.
7시에 알베르게를 나섰지만 어두운 하늘을 아무리 올려봐도 별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 구름이 꽤나 껴 있는 모양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산길을 빈약한 헤드랜턴과 그를 보좌하는 휴대폰 플래시로 밝히며 걷는데 많이 춥지 않아서 그런 건지, 전보다는 시야가 나아서 그런 건지, 이틀 전 어둠 속에서 트리아카스텔라를 떠날 때처럼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안에 무언가가 변화한 것일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그저 어둠 속에서 발 밑을 조심하며 걸을 뿐.
30분 좀 넘게 걷다 보니 100km 비석이 나타났다. 이제 이 비석에서부터 꼭 100km 지점에 산티아고가 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기념한 덕분인지 세계 각국의 언어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 어제 낮에 이곳을 지났다면 아마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줄을 서 있었겠지만, 이른 새벽 가로등도 없는 마을에서 아무도 없는, 심지어 사진 찍어줄 이 조차 지나가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난 조용히 좀처럼 찍지 않던 셀카를 찍었다. 이제 정말 두 자릿수 거리가 남은 것이다.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지 기운이 나서 씩씩하게 걸어 1시간 정도 지나 모우트라스에 도착했다. 작고 조용한 마을인 이곳의 명물(?)은 한국 라면을 파는 가게였다. 며칠 전부터 순례길의 한국 음식 파는 가게들에 대한 내용이 있는 블로그에서 정보를 확인했고 구글 맵으로 위치와 오픈 시간까지 확인해서 찾아갔는데, 내가 도착했을 땐 문이 닫혀있었다. 구글맵엔 분명 7시 45분에 연다고 되어 있었는데, 8시 30분이 되도록 문을 열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 9시가 다 되어 여는 걸까 생각하며 가게 앞 벤치에 앉았다. 어차피 쉴 때도 되었고 발도 좀 말려야 했으니까. 까미노 바로 옆이라 가끔씩 내 앞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올라!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길 20분째. 아무래도 더 늦게 문을 여나보다 생각하고 신발을 신으려는 찰나 문이 열렸다.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인사하길래 들어가도 되냐 묻고 신나게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떡하니 한국 라면과 김치, 햇반을 진열해둔 매대가 보였다.(물론 다른 매대엔 일반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과 순례길 기념품 등도 진열되어 있었지만 라면에 눈이 먼 한국 순례자에게 그런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신라면 봉지라면과 캔 김치, 햇반, 진라면 컵라면 하나를 집어 들고 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사장님이 먹고 가라는 말과 몸짓을 해 보이길래 당연히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를 우렁차게 외치며 식당으로 입장했다.
젓가락과 숟가락을 세팅해주시고 컵라면 익힐 물을 전기 포트에 넣어주며 햇반도 먹을 거냐고 물어서 그렇다 했더니 바로 전자레인지에 돌려준다. 김치도 지금 먹을 거냐고 묻길래(아마도 캔을 따 주시려는 듯) 그건 아니라고 했더니 전기포트의 물은 2분 정도면 끓을 거라고 알려주고 가게 영업 준비하러 가셨다. 정말 상냥하고 친절하고 (특히 라면을 파신다는 점에서) 좋은 분이셨다.
라면 물을 붓고 3분 기다리는 동안 영상 촬영할 준비를 하고 먹고 남을 햇반 밥을 담을 비닐봉지까지 준비하고 드디어 컵라면 개시! 원래도 좋아했던 진라면 컵라면인데 여기서 먹으니까 정말, 고향의 맛이 이런 건가 싶게 맛있었다. 한 젓가락 한 젓가락 사라지는 게 슬플 지경이었다. 햇반을 까서 국물에 밥을 말아 한 술 뜨는데 또다시 고향의 맛이다. 쫀득쫀득한 한국 쌀의 밥맛이 이렇게나 맛있었던 건가. 푸석푸석한 스페인 쌀에 어지간히도 지쳐있었나 보다.
원래 나는 햇반 한 개 (210g)를 한 번에 다 먹지는 못해서, 덜어뒀다가 오늘 저녁밥이나 내일 아침밥으로 먹을 요량으로 덜어둘 비닐봉지까지 옆에 준비해뒀었는데, 맛있는 국물에 밥을 야금야금 말다 보니 어느새 햇반 한 공기를 다 비워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 먹는 건 저녁 만찬급인데, 고작 두 번째 아침밥에서 저녁밥 양의 식사를 마쳐버린 것이다.
부른 배를 행복하게 끌어안고 가게를 나오니 어느새 9시 30분이다. 이곳에서만 한 시간을 머물렀지만 컵라면을 먹었으니 되었다. 나는 한국 컵라면 먹은 사람이다! 가자! 힘을 내서 열심히 걷고 또 지옥의 내리막을 지나 10시 반에 포르토마린에 도착했다.
사리아에서도 그러더니, 이곳에서도 구 시가지로 들어가려면 어마어마한 계단을 올라야 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해서 옆을 둘러봤더니 완만한 오르막이 있어 냅다 그리로 올랐다. 언덕을 다 올랐다고 생각했는데 또 급경사 언덕이 나타났다. 그렇게 열심히 먹고 이렇게 기운을 다 쓰는구나. 계단을 오르는 게 차라리 나았으려나?
오늘은 주일이라 미사를 드려야 했기에 미사 시간 확인할 겸 성당에 들어갔다. 외관은 낡은 중세의 탑 같은 느낌이 강했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서 보니 흰 칠이 되어 있어 담백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이었다. 미사 시간은 12시 반. 아직도 2시간 여가 남아 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미사 후에 먹고 가면 너무 늦어서 이른 점심(혹은 세 번째 아침밥)으로 간단히 뭘 좀 먹기로 했다.
성당 근처의 카페 겸 바에서 카페 콘 라체 하나를 시키고 또르띠야 하나를 시켰다. 보통 또르띠야는 넓은 팬에 두껍게 만들어서 피자처럼 잘라서 하나씩 제공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가게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인지 어제 아침에 먹은 '프렌치 오믈렛'과 비슷한 비주얼의, 덜 말린 계란말이 같은 또르띠야를 내어주었다. 비주얼과는 다르게 속이 촉촉해서 맛있게 먹으려는데 빵 필요하냐는 말에 Yes라고 대답했다가 추가 요금을 내고 말았다. 0.6 유로 정도였지만 서비스인 줄 알고 좋다고 한 건데 돈을 받을 줄은 몰라서 살짝 당황했다. 내 돈 주고 산 빵이니 알차게 먹고 남은 건 도시락통에 챙겼다. (물론 그전에 가게들에서도 공짜 빵 먹고 남은 건 다 챙겼었지만)
휴대폰 충전도 하고 일기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다 12시가 다 되어 바에서 나와 광장에서 기념사진, 영상 좀 찍고 바로 아래의 슈퍼에 가서 물 하나를 사서 성당에 들어갔다. 한국의 성당에서와 다르게 신부님이 직접 라이터를 들고 다니며 초를 켜는 게 좀 신기했다. 늦어도 1시쯤엔 출발해야 한다는 내 바람이 통했는지 미사는 1시에 끝났다. 포르토마린에 들어올 땐 가랑비가 조금씩 흩날리고 있었는데, 마을을 떠날 때가 되니 햇볕이 쨍하고 비치며 파란 하늘이 나타난다.
선크림을 다시 바르고, 선글라스를 쓰고, 겉옷을 벗고 씩씩하게 출발했다. 아까는 지나쳤던 그 계단의 높은 단차를 벌벌 떨며 내려가고 그 뒤부턴 쾌적한 산길이었다. 물 한 병과 통조림 김치가 들어갔는데도 어쩐지 가방이 무겁지 않고 가벼웠다. 아마 미사를 드려서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강론 때 졸지도 않아서) 기운이 많이 차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무슨 일을 저지른 줄도 모르고.....
발 밑에 기운이 너무나 뻗쳐서 많은 사람들을 추월해가며 도로와 숲길을 넘나드는 약 8km의 길을 1시간 40분 만에 주파한 끝에 오늘의 숙소, 곤자르에 도착했다. 예약해둔 알베르게에 들어가 체크인을 하려는데 구성원과 국적을 묻던 직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오늘 날짜가 아닌 어제 날짜로 예약을 했다는 것이다! 스페인어도 부족하고 영어도 모자라서 '마냐나(내일의) 마냐나(내일)'로 예약을 해왔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났나 보다. 난 본의 아니게 어제 날짜를 노쇼하게 된 셈이라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혹시 오늘 내가 묶을 침대가 있는지 물어보았다. 다행히 베드는 여유가 있어서 무난하게 체크인할 수 있었다.
체크인도 했겠다, 샤워와 빨래를 하는 동안 휴대폰 충전이나 해두자 하고 배낭 속 충전기를 찾는데, 아무리 찾아도 충전기가 안 나온다..... 포르토마린에서 덜 말린 계란말이를 먹었던 바에서 미사 전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휴대폰 충전이나 하야겠다고 내 자리에서 좀 떨어진 콘센트에 충전했던 기억이 났다. 분명히 충전을 끝내고, 휴대폰과 선을 분리하고, 콘센트에서 충전기도 뽑아서 늘 쓰던 파우치에 넣었는데, 정작 그 파우치를 챙기는 것을 잊었던 거다. 패닉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빨래 걱정에 일단 샤워부터 마쳤다. 따끈한 물에 머리를 좀 식히(?)고 나니 대충 계획이 잡힌다.
1. 포르토마린의 바에 전화해 내 물건이 있는지 확인한다
2. 카톡과 인스타로 내 물건 픽업이 가능하고, 나와 내일쯤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을 찾는다
3-1. 찾으면 그분께 부탁
3-2. 못 찾으면 택시 타고 포르토마린으로 간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아이폰 충전기를 파는 상점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배달인(?)을 찾지 못하면 꼼짝없이 포르토마린으로 가야 하는 이런 계획이라도 세우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이 되었다.
이제 관건은 아까 그 바에 연락해서 내 파우치가 있는지, 있다면 보관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구글 맵에서 찾은 전화번호로 연락을 해서 물어보려는데, 영어가 전혀 통하질 않는다! 일단 전화를 끊고 번역기 어플로 '나의 녹색 주머니가 그곳에 있습니까? ', 'Si 입니까 No 입니까?', '잠시만 보관해주세요' 등의 문장을 검색해 발음을 연습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복잡하게 대답하면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 맞냐 아니냐로 물어봤고 대답은 Si 였다! 됐다! 이제 픽업해줄 사람만 구하면 된다. 아스토르가에서 백숙을 같이 먹었던 한국분을 포르토마린의 바 앞에서 잠시 마주쳤던 생각이 나서 그분을 찾으려고 한국 순례자들이 있다는 오픈 카톡방에 들어가려는데 보안코드가 있다며 입장이 안되었다. 다시 암담해질 찰나, 인스타그램 DM으로 J커플이 연락이 되었다. 마침 포르토마린에 묶고 있다길래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흔쾌히 ok 해주셨다. 내일은 팔라스 데 레이에서 묶으신대서 마침 나도 그곳에서 묶으니 내일 만나서 충전기가 든 파우치를 받기로 했다.
빨래를 마저 털어서 널어두고 나니 긴장이 풀린다. 이미 많이 먹은 하루지만 속을 좀 채우고 싶어서 바에 가니 저녁이 되어야 주방을 연다고 한다. 맥주와 간단한 안주 하나만 얻어서 기력을 충전하고서, 내 옆의 침대를 쓰는 순례자도 아이폰인 것 같길래 슬쩍 충전기 좀 쓸 수 있냐 물어보았는데 흔쾌히 쓰라고 해줘서 아이폰도 충전할 수 있었다. 아마 오늘 저녁에도 풀 충전은 안될 테니 내일 길 가는 동안 배터리를 아끼고 아껴야겠다.
맥주도 다 마시고 잠깐 알베르게 앞 작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쉬는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순례자가 말을 건다. 이름은 그레고리였고, 바르셀로나 사람이었으며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지만 대화를 하겠다는 의지만은 가득해서 손짓 발짓 눈짓 몸짓을 다 섞어가며 이 까미노를 11번이나 걸었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이해시키고야 말았다.
주방이 없는 알베르게라 요리를 해 먹는 건 어려워서, 숙소 겸 바에서 판매하는 순례자 메뉴를 저녁으로 시켰다. 샐러드 믹스는 참치 통조림에 양상추 토마토 양파와 채 썬 당근 비트 아스파라거스가 들어간, 약간은 독특한 샐러드였고 맛있었다. 빵이랑 같이 야무지게 먹고 나서 메인 디시로 시킨 연어스테이크를 먹어보았다. 첫맛은 살짝 비렸지만 같이 나온 레몬 조각을 잘라서 뿌리니 꽤나 맛이 살아났다. 함께 나온 것 중에 시래기 통조림도 있었는데, 안 끓여먹을 땐 이렇게 먹는구나 싶었다. 순례자 메뉴에서 빠질 수 없는 와인도 한병 깔끔하게 마셔주고 빨래 걷어와 정리까지 마쳤는데도 저녁 8시가 안되었다.
별이라도 보고 놀고 싶었지만 휴대폰 배터리를 아끼려고 아예 일찍 자버렸다. 내일은 꼭 충전기랑 만나게 해 줄게.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