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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May 14. 2021

산티아고 가는 길 - 서른네 번째 날

팔라스 데 레이 -리바디소(26km)




우비를 준비한 채로 걷는 아침


   늦은 시간까지 와인을 마셔서 좀 걱정했지만 다행히 6시 기상에 성공했다.  씻고 선크림 등을 바르고 짐 챙겨 나와 1층의 리셉션에서 크로와상에  복숭아와 커피로 아침을 먹고 양치도 하고 짐가방까지 정리해서 7시 8분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일출은 아직도 한참 남아 작은 도시엔 가로등만 점점이 켜져 있었다. 바로 옆 침대에서 묶었지만 내가 일어났을 때 이미 자리를 뜬 상태였던 J커플은 마을 광장 한쪽의 바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서 반갑게 인사하고 본격적으로 오늘의 길을 출발했다. 


보슬비가 내리는 숲 길. 우비를 쓸지 말지 고민이 된다.


   포장도로인 마을길을 벗어날 무렵부터 안개인지 보슬비인지 알 수 없을 물방울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비를 꺼낼까도 싶었지만 왠지 이러다 말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그냥 걸었다. 내 앞뒤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점점 산티아고에 가까워지고 있긴 한가보다. 왼쪽 무릎과 발목이 살짝 불편해서 좀 천천히 걸었다. 좀 앉아서 쉬었으면 좋으련만,  쉬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어 거의 2시간을 쉼 없이 걸어 첫 번째 카페에 도착해서 잠시 숨을 돌렸다. 화장실도 갔다가 커피 하나를 시켜서 아침에 먹고 남은 크로와상과 사과로 두 번째 아침을 먹고 다시 기운 내서 걸었다. 



멜리데와 뽈뽀


  한참을 걷는데 비가 점점 많이 오기 시작한다. 빗줄기는 굵지 않아서 마치 미세 분무되는 샤워기를 수십대 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날씨가 꾸물거릴 때부터 언제든 바로 꺼낼 수 있게 배낭 맨 위에 꽂아놓은 우비를 빠르게 꺼내서 도롱이처럼 휙 둘러 장착하고, 약 한 시간을 더 걸어 멜리데(Melide)에 도착했다. 며칠 전 사모스 들어가던 날처럼, 방수가 부실해 안에 입은 옷들과 찰싹 달라붙은 비옷 덕에 몰골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안경에 물방울이 가득해서 앞도 제대로 못 보는 채로 검색해둔 뽈뽀 집을 가려고 작은 코너를 도는데 누군가 영어로 나를 부른다.


-헤이, 레이디!


   빨간 비닐 무더기에 달린 다리 두 개 정도로 보였을 나를 과연 '레이디'로 본 것이 맞는지는 아직도 확실치 않지만,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친 뽈뽀 가게의 직원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의 만두가게처럼, 입구 쪽 벽은 넓게 열려 바로 앞에 문어가 들었을법한 솥 몇 개의 틈으로 허연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고 있었고, 나를 부른 직원은 그 솥을 이리저리 만지면서 '안쪽에 네 친구들이 있어!'라며 열심히 호객 중이었다. 슬쩍 가게 안쪽을 보니 몇 번 지나쳤던 대만 순례자들이 보인다. 내가 봐 둔 뽈뽀 집도 아니었고, 동양인을 한 국가로 뭉뚱그리는 인종차별도 거슬렸지만, 무시하고 지나치기도, 열을 내며 항의하기도 몹시 지친 상태였으므로 그냥 가게에 들어가기로 했다.


멜리데 가는 길과 멜리데에서 먹은 뽈뽀(와 맥주)



   겉에서 보이는 것과 다르게 가게 내부는 굉장히 넓었고 순례자들도 꽤나 많았다. 우비를 한쪽에 걸어두고 뽈뽀 한 접시를 주문하고 화장실도 다녀왔다. 자리에 앉아 서빙된 맥주와 뽈뽀를 보고 눈이 뒤집혀 쩝쩝거리면서 입에 집어넣은걸 보면 내가 어지간히도 지치긴 했던 거 같다. 적당히 짭조름하고 약간 매콤하고 고소한 문어는 인당 0.8유로를 받는 빵과 같이 먹으니 더 맛있었다.  큰 접시, 작은 접시 중 고민하다 작은 접시를 시킨 거였는데 빵과 같이 먹으니 한 접시도 딱 적당히 배부를 정도로 먹을 수 있었다. 



수상한 몰골의 순례자


   점심을 먹고 나오니 11시 반, 다시 출발이다. 비가 엄청 거세졌다. 마을의 구석 길을 지나 뒤쪽 길도, 다시 숲으로 이어진 길을 걷는데도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서 다리까지 다 젖었다. 안경은 분무기를 계속 맞은 듯 물방울이 가득 맺혀있어서, 손끝으로 안경 한쪽을 살짝 건드리자 작은 물방울들끼리 뭉쳐서 주르륵 흘러내릴 정도였다. 더운 숨을 내쉬자 안 그래도 물방울 맺힌 안경에 김까지 서린다. 역시 아침에 안경 대신 콘택트렌즈를 끼고 나왔어야 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걸은 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남은 거리가 10km 정도라 2시간 반 정도만 걸으면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1시간 반이 지나도록 5km가 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비 오는데 방수 안 되는, 그런데 습기는 그대로 모아져서 더 걸리적거리는 비옷에다 앞이 안 보이는 안경에 (아마 지쳐서 그런 거겠지만) 왠지 엄청 더딘 스틱의 콤보로, 멜리데에서 뽈뽀 먹은 뒤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도 리바디소에 도착했을 땐 2시 8분이었다. 심지어 숙소는 마을 끝 언덕 쪽에 있어서 체크인까지 했을 땐 2시 20분이었다. 비 때문에 상체가 난장판이었고 흙길에서 튄 진흙물 때문에 신발과 바짓단도 거지 중에 상거지 꼴이었는데도 리셉션과 바의 스탭들 모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아마 이런 꼴(?)로 도착하는 순례자가 나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올 땐 건조기!


  1층의 바/레스토랑을 지나 2층 창가의 1층 침대를 배정받고 샤워하고서 빨래를 마치고서, 비가 쏟아지는 통에 자연 건조는 힘들겠단 생각에 건조기에 동전을 넣고서 작동시키려는데 어디선가 리셉션 스탭이 다가와 뭐라고 말을 한다. 번역기 어플로 돌려보니 '건조기를 돌리기엔 빨랫감이 너무 젖어있다'라고 한다. 아마 화력(?)이 그렇게 좋진 않아서 젖어있으면 건조가 잘 안 되는 모양이다. 난 그래서 '내가 다시 꽉 짜서 넣겠다' 고 말하고 빨래를 꺼내는데, 직원이 갑자기 건조기 옆에 있던 세탁기를 가리킨다. 


-나 손빨래는 이미 다 했어요!(바디랭귀지)

-(스페인어)

-?? 혹시 세탁기의 탈수 기능을 쓰라는 거예요? (바디랭귀지)

-(끄덕끄덕)


   하더니 본인 돈(인진 모르겠지만)을 세탁기에 넣어 탈수를 돌려준다. 탈수가 끝나면 자기가 꺼내서 건조도 돌려준다고 한다. 나야 좋지 뭐. 


   바에서 샹그리아 하나를 시켜 앉아서 먹고 휴대폰도 하면서 쉬다가 올라와서 일기를 썼다. 날이 춥고 습해서 그런가 동네 구경 나가기도 귀찮다. 왠지 감기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숨 자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저녁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 보니 까미노에서 먹은 첫 샹그리아다. 물론 맛있음!



관광지 까미노, 나의 까미노


  순례자정식중 첫 번째로 나온 샐러드 믹스는 토마토와 양파 상추뿐이었고 메인디쉬인 뽀요는 정말 익힌 닭다리 하나와 감자튀김뿐이었다. 맛이 없진 않았지만 양이 좀 적어서 오징어 튀김과 맥주를 더 시켜서 먹어야만 했다. 샤워실도 깔끔하고 직원도 친절했지만 역시 구글 평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욕을 해도 '밥도 못 얻어먹을 사람'으로 지칭할 정도로 식사에 민감한 한국인이라 그런지, 맛이나 양에 비해 가격이 비싸니 제대로 서비스받지 못한 느낌이 든다. 


  산티아고로 가까워질수록 어쩐지 상술이 심해지는 것만 같다. 순례자를 위하려는 마음보다 적은 투자로 쉽게 돈 벌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관광지를 지나는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새로 합류한 순례자들도 순례의 마음보단 관광의 마음이 많이 보인다면 나의 착각일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벌 옷도 등산스틱도, 좋은 등산화도 없이 이 길을 걸었던 중세의 순례자들이 내가 편하게 걷고 매 끼니 잘 먹는 모습을 본다면 지금의 나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수 십 년이 걸리는 꼰대의 길을 불과 한 달 만에 걷게 된 기분이다.


  오랜만에 Walid에게서 연락이 왔고, 사리아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도현 씨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오늘 42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고 한다! 가녀린 몸으로 삐그덕 거리며 걷는 게 안쓰러웠었는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저녁을 먹고서 이것저것 검색을 했다. 산티아고에서 증서를 받는 시간,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로 가는 버스시간들을 찾아보고 있으려니 내가 이 길을 걷는 목적이 증서였나? 피스테라였나?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거의 도착해 가니까, 걷는 여정이 거의 끝나 가니 이제 남은 약 30km는 까미노도 아니라는 생각도 있는 걸까? 모르겠다. 지금 일단 그저 눈 앞의 것을 바라기로 했다.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내일도 나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너무 흔들리지 않기를.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gEo7xJKmn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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