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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파 Sep 11. 2021

산티아고 가는 길 - 서른여섯 번째 날

오페드로우소-산티아고데 콤포스텔라(19km)


잠 못 이루는 밤



   행군과도 같았던 36일의 걷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진짜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행(?)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거의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1-2시간 간격으로 깼다가 시계 보고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는데, 추워서 깬 것도 있지만 설레서 두근거리는 마음이 제일 컸던 것 같다. 첫 연애 때도, 마지막 실연 때도,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 하나는 끝내주게 잘해왔던 지난 세월 덕에 나의 심리상태는 나의 신체 리듬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5시에 일찍 일어나 씻고 정리해서 살며시 나와 리셉션 옆의 간이 키친에서 어제 산 빵과 오렌지 조금 먹고 짐을 챙겼다. 짐을 챙기며 보니 어젯밤엔 베드 버그 약과 피임약을 안 먹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 잠을 설친 건 그것 때문이었을까?


   6시에 알베르게를 나서 출발했다. 해가 늦게 뜨기 시작한 이후로 6시에 출발하는 것은 오랜만인데 정말 완전 한밤중처럼 어두웠다. 휴대폰 플래시와 헤드랜턴을 풀가동해도 너무 어두워서 마을을 벗어나는 숲길에서 길을 잃을 뻔했다. 다행히 뒤에서 나타나신 한국인 순례자 무리가 왁자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길래 슬며시 그쪽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숲길을 벗어나니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역시 이른 새벽이라 잠들어있고 스틱 소리는 이들의 숙면에 방해가 될 것이 뻔해 잠깐 가방을 내려 스틱을 가방 양쪽에 걸고서 두발로 열심히 걷기 시작했다. 오르막이든 어둠이든 숲길이든 어째서인지 두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불과 열흘 전에는 울면서 어두운 안갯속을 걸었었는데 말이다. 땀이 흠뻑 쏟아지고 숨이 거칠어지지만 속도를 늦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서쪽 하늘 가득 그 이름처럼 별이 쏟아지는 땅,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걷는다.



공항을 빙 돌아가는 큰길에 있던 산티아고 비석.  깜깜할 때 지나가서 자칫하면 지나칠 뻔했다.



별이 쏟아지는 땅,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공항 근처의 숲길은 변변한 조명 하나 없이 어두웠지만 달빛인지, 아니면 공항 쪽에서 쏟아지는 불빛 때문인지 길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어디선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분명 밤인데도 새까만 나무 덕에 오히려 밝아 보이는 밤하늘, 그리고 그보다도 더 밝게 빛나는 별빛이 동쪽 하늘에 가득했다. 숲길이라 사람도 드물겠다 아예 앞을 안 보고 하늘을 바라보고 걷다가 별똥별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공항 경계를 따라 빙 둘러 이어지는 길을 지나 도착한 작은 마을의 성당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드렸다. 숨이 가빠 주모경(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 세가지만 간신히 바쳤다. 어느새 하늘은 점점 밝아오지만 옅은 안개 때문인지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인다. 


   2시간 동안 10km를 주파한 끝에 드디어 들어갈만한 바가 나타나서 들어갔다. 화장실 먼저 가려했는데 다른 사람이 사용 중이라 커피 먼저 주문하며 카운터를 둘러보았다. 실내에서 신발 벗지 말라는 문구가 보여 황급히 야외석으로 짐을 옮겼다. 추웠지만 양말을 벗고 발을 말리며 10분 만에 빵과 커피를 마시고서 고개를 내밀어 건물 안쪽의 화장실을 다시 보는데 사람이 아까보다 두 배는 더 많아졌다! 짐 정리하면서 기다렸다가 사람 없을 때 재빨리 들어가 일을 마쳤다. 





어마어마한 순례자 행렬.  내 뒤로도 아주 많이 더 있었다.

  


   짐을 챙겨서 나오니 8시 30분. 아까보단 훨씬 밝아졌다. 이제부턴 작은 마을 마을 이어진 길이라 숲길은 없는 듯하다. 파워워킹으로 열심히 걷는데 아까보다 사람이 훨씬 많아졌다. 첫날 생장에서 출발하던 느낌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이 이어져있었다.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해있던 나는, 몸에서 쏟아지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엄청난 속도로 걸어 내 앞에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을 다 추월하는 무시무시한 질주를 했다. 까미노는 경쟁이 아니고, 그들을 이기고 싶단 생각은 없었지만, 산티아고에 어서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모든 것을 치우고서 내 발을 직접 움직였다.


   산타 마르쿠스에 진입하는 길에 며칠 전 팔라스 델 레이에서 같이 닭볶음탕을 먹었던 한국 순례자를 만나 몬테스 데 고조까지 함께 걸었다. 몬테 데 고조는 산티아고 도착 전에 만나는 마지막 언덕인데, 예전의 순례자들은 이곳 언덕에서 보이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보며 드디어 산티아고에 도착했다며 기뻐해서 이곳을 몬테스 데 고조, 환희의 언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미사는 없는듯한 작은 성당에서 쎄요도 찍고 촬영도 하고 잠깐 쉬다가 언덕을 내려왔다. 언덕을 내려오는 길은 바로 산티아고로 이어진다. 레온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 외곽을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했다.

 


산티아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사이에 있던 까미노 싸인.

 


  굉장히 현대적인 모습의 시 외곽 거리에 현지인은 많이 보이질 않았고, 까미노 표지판은 그 어느 도시에서보다 정확했다. 나는 이제 막 도착한 관광객의 싱싱한 표정과 우렁찬 발걸음으로 산티아고 시내를 휘저었다. 드디어 오래된 박석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는 구시가지 쪽으로 들어선다. 광장에서 나의 도착을 기다리던 도현씨의 연락이 왔다. 단체 관광객이 많이 몰려있어 지금은 좀 어수선하다며 내 감동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조금 더 있다가 광장에 들어오기를 추천했다.


   하지만 이날, 이때만을 기다렸던 나는 걸음을 살짝 늦추는 것 이상의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가 않았다. 백파이프 유랑단과 그 앞을 지나는 수십 명의 관광객 여파를 지나서 마침내 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는 광장으로 들어섰다!



도착, 그리고 재회




  마침내 마주한 산티아고 대성당의 모습. 푸른 하늘 아래 아이보리색 벽돌로 외관이 덮인 커다란 성당이었다.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많이 봤는데도, 그 순간은, 정말 너무나 뭉클했다. 모든 걸 다 해냈다는 뿌듯함,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쁨, 그리고 왜인지 모를 서러움과 힘듦이 뒤섞여 눈물이 났고, 마침 그때 광장 한쪽에서 도현씨가 나타났다. 광장에 도착한 나를 촬영하고 있었고, 내가 운다며 나를 조금 놀렸지만 난 안 울었다고 괜히 우기고서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동지, 한 달을 넘게 같은 길을 걸어온 친구의 품은 따뜻하고 반가웠다.



드디어 도착했다! 산티아고!






광장에서


    완주 인증서를 받아야 한다며 그녀가 나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대성당 근처라고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해서 도현씨가 없었다면 꽤나 헤맸겠구나 하는 생각과, 이틀 먼저 도착하더니 정말 현지인(?)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조금 웃음이 났다. 이끄는 대로 정신없이 갔더니 순례자 사무실이 나타났고 영수증처럼 생긴 QR 번호표를 받았다. 내 번호는 645번. 오늘 645번째로 산티아고에 도착한 순례자인 거다. 번호표를 뽑아준 직원은 지금 현재 완주증을 수령하고 있는 번호가 200번대이니 앞으로 3시간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알려주었다. 안 그래도 광장에서 좀 더 여운을 느끼고 싶었기에 잘 되었다 싶었다. 

 

   다시 광장으로 돌아와 다시 마주친 한국 순례자들과 인사하고, 도현씨와 함께 사진을 찍고 있으니 어디선가 JS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다가와 산티아고가 새겨진 샷잔을 내밀며 와인을 따라준다. 부지런히 걷는 사람이라 빨리 도착할 거라곤 생각했는데 이렇게 와 있다니! 거기다 완주한 지인들에게 와인 한잔씩을 대접하는 다정함이 정말 예쁘게 보였다. 



대성당 인근의 프란치스코 성당. 대성당 공사기간 동안 이곳에서 미사가 있다고 한다.




   다른 순례자들처럼 광장 한쪽에 앉아 햇볕을 받으며 대성당을 바라보다가, 미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 순례자 미사가 있다는 성당으로 향했다. 원래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를 하지만, 지금은 몇 년째 공사 중이라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성당인 프란치스코 성당에서 미사를 한다고 한다. 순례자뿐만 아니고 관광객도 굉장히 많아 앉을자리를 찾을 수 없어 그냥 한쪽에서 서서 미사를 드리는데, 이제야 완주의 후유증이 나타나는 건지 발이 부어가며 아파오기 시작한다. 신발끈을 슬쩍 풀었는데도 다리와 발이 계속 아파와서 어쩌나 했는데 마침 빈자리가 난 것을 도현씨가 발견하고선 그쪽으로 앉으라고 해주었다. 예전 프랑스산 유심 해결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는다. 


   그동안 걷다가 만난 작은 성당에서든, 주일 미사에서든 성당에 들어가면 늘 내가 아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의 건강을 빌었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그 어떤 의식도 없이, 내가 그들을 돌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가 흘러나왔다. 내 안에선 무엇이 달라진 걸까?


  미사가 끝나고선 E, D, 도현씨와 함께 점심을 먹으러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E는 어제 산티아고에 도착했고, D는 오늘 새벽 1등으로 도착해서 선착순 10명에게만 주는 레스토랑 당일 점심 식사권을 받았지만 우리와 함께 먹겠다며 그 식사권을 과감히(?) 포기했다! 가장 늦게 도착한 나를 위해 함께 점심을 먹어주는 이들을 위해, 나는 와인 한 병을 추가 주문해서 한잔씩 돌렸다. 


팜플로나의 호스텔에서 처음 만난 세 사람과 마지막 날 다시 만나 함께 점심을 먹었다.




  QR 번호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는 사이트도 있어서 거기에서 번호를 체크하다가 내 번호가 가까워진 것 같아 입에 후식 아이스크림을 문 채로 아까의 그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 내부는 촬영이 불가능했고 한쪽에 앉아서 조금 기다리니 내 번호가 화면에 떠서 완주증 적어주는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순례자가 많기 때문에 당연히 한 직원이 전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도장을 찍어온 크레덴시알(순례자 여권)을 확인하고 완주증에 이름을 적어주는 직원은 그냥 쓱 봐도 3~4명은 되어 보였는데, 앞서 만난 한국 순례자들이 사무실 직원의 글씨가 악필이라 자신의 이름이 예쁘게 적히지 않았다는 귀여운(?) 불만을 제기했던 터라, 내심 나의 이름은 어떻게 적히게 되는 걸까 살짝 두려웠지만 다행히 무심한 듯 보이던 직원은 아주 멋진 필기체로 내 이름을 써주었고 난 그렇게 완주증을 받을 수 있었다. 사무실 한쪽에선 기념품도 팔고 있어서 몇 개 사고 나와서 다시 광장으로 향했다. 



멋진 글씨체의 순례 완주증. 추가 요금 내서 두 장을 받았는데 무슨 차이인진 아직도 모르겠다.


   Z부부도 다시 만나 인사했고 점심 멤버들과 나란히 대성당 앞에서 사진도 찍고 놀다 헤어졌다. 산티아고 대성당에 들어가 보려다가 배낭은 출입금지라고 하여 내일 다시 와보기로 하고 팜플로나에서 부친 내 짐을 찾으러 우체국으로 향했다.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setpalimJ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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