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자르 - 팔라스 데 레이 (16km)
일찍 잠자리에 든 덕인지 새벽 1시쯤 잠깐 깬 걸 빼곤 5시가 넘도록 푹 잤다. 중간에 깨었을 때 소똥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의아했는데 나중에 나와보니 냄새가 더 많이 났다. 씻고 옷 갈아입고 단장하고 침대에 앉아 짐을 가방에 욱여넣고 거실 쪽으로 나와 다시 짐을 꾸렸다. 나 말고 다른 순례자 네 명이 짐을 꾸려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들끼리 너무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어 안쪽 방에서 자는 순례자들이 깰까 싶어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어젯밤에 나에게 충전기를 빌려준 두 분은 이미 일찍 떠나셨고(내 목적지인 팔라스 보다 더 지난 멜리데까지 간다고 했었으니 오늘 갈 길이 멀 것이다.) 난 천천히 준비해서 7시 8분에 출발.
어제 맑아서 그런지 오랜만에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갈리시아 들어오고선 정말 오랜만에 맑은 새벽하늘이다. 멀리서 부엉이 소리가 들려오고 더 먼 곳에선 별빛이 내리고 발 밑에선 소똥 냄새가 올라왔다. 여러 감각이 활성화되는, 환상적이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어둠이 무섭지 않다. 어제도 그러더니, 이제 역시 어둠 속을 걷는 것에 적응한 걸까.
마을 뒤쪽의 언덕으로 난 길을 헉헉거리며 오르고 나니 안개 덮인 마을과 더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 너머로 일출이 시작되고 있는 게 보였다. 시퍼런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안개를 비추며 밝아지는 모습이 자꾸만 발길을 잡아서, 그런데 사진이나 영상을 찍기엔 휴대폰 배터리가 빨리 닳을까 걱정되어 그냥 눈으로만 계속 담았다.
부지런히 계속 걸어 8시 30분쯤, 오스피탈 마을에 이르러서 두 번째 아침을 먹었다. 파운드 케이크는 그저 그랬는데 커피가 양이 많은데도 가격이 싸서 고마웠다. 화장실도 들렀다가 다시 신나게 출발. 역시나 어제처럼 사람이 많았다. 어제 오후에 곤자르 도착할 때쯤 지나친, 아마 일행은 아니고 그냥 동행인듯한 한국인 아줌마와 아저씨를 또 지나쳤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아저씨가 '어제 그 사람이네? 오늘 어디가?' 하고 반말로 대답하길래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인사 말곤 말 한번 안 섞었는데 대뜸 반말하는 무례함이 몹시 거슬렸다.
두 사람을 추월해서 빠른 속도로 걸어서 거리는 계속 벌어졌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오늘 저녁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날(?) 그 아저씨와의 언쟁이 진행 중이었다. 실제로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아무 말 못 하고 어버버 했던 과거의 경험에서 나온 방어기제였겠지만, 내 길을 가고 나의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까미노에서 남을 미워하고 험담하기 위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게 순례자의 태도가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하느님이 이런 나를 슬프게 보고 계실 거란 생각이 들어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을 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그 이후론 마음이 조금 더 편안해져서 다시 기운 내서 씩씩하게 걸었다.
오늘 목적지 팔라스 데 레이까지 40분 정도 남았을 때 작은 마을에 도착했는데 바에서 뭔가 사 먹을까 잠깐 고민하다가 바 옆의 등나무 아래에서 잠깐 발만 말리기로 했다. 가방을 내려놓는데 등받침 부분에서 엄청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서 깜짝 놀랐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어서 내 땀은 아니고 모여있던 습기가 증발하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딱 10분 동안 발 말리고서 다시 출발하는데 길에 밤톨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이 동네는 가로수로 밤나무를 심는듯, 거의 2미터마다 밤송이가 우수수 떨어져 있었고 아마 자동차에 밟힌 건지 으스러진 밤송이들도 꽤나 많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밤을 먹지 않는 건지, 새로 떨어진 밤, 오래된 밤들이 길 가에 마구 뒤섞인 채로 떨어져 있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버려지는 게 안타까워 저절로 손이 갔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엄마가 가을 뒷산을 다녀오시면 늘 주머니에 밤이 가득해서 엄마 때문에 뒷산 다람쥐 다 굶어 죽는다고 구박을 했었는데, 그런 나도 동글동글 예쁜 밤톨을 보니 안 줍고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정말 예쁜 두상을 두고 밤톨 같은 머리라고 하는데, 그 말이 과연 과장이 아니었나 보다. 한 손에 쥘 정도만 몇 알 줍고서 덥지 않고 좋은 날씨를 사복 사복 걷다 보니 어느새 팔라스 데 레이에 도착했다.
여태까지 봤던 까미노의 마을 중에서 현대 느낌이 좀 많이 나는 작은 도시였다. 마을 초입의 언덕을 하나 지나 찾은 나의 알베르게의 문에는 1시 30분에 오픈이라는 글이 붙어 있었다. 근처의 슈퍼 에로스키에 가서 장을 간단하게 보고 돌아왔는데도 12시라,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 겸 바에서 커피 하나 시켜 놓고 시간을 잠시 보냈다. 간당간당한 휴대폰 배터리를 부여잡으면서 오늘 이 도시에서 만나기로 한 J 커플에게 연락을 해보니 아직도 걷는 중이라고 한다. 내 휴대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 연락이 안 될 상황을 대비해서 서로 예약해둔 알베르게 이름과 주소를 공유했는데, 알고 보니 나와 같은 알베르게였다! 역시 우린 인연인가 보다 하고 웃다 보니 어느새 체크인 시간이 되었다.
2층의 리셉션에서 체크인하고 받은 방은 3층의 5인실이었다. 대충 짐을 풀고 샤워실로 향했는데, 넓은 통창(물론 커튼으로 가려짐)에서 햇살이 들어오는, 이제까지 갔던 알베르게 샤워실 중에서는 제일 좋은 시설이었다. 산뜻하게 씻고서 리셉션 옆 베란다 겸 빨래터에서 햇볕을 그대로 받으며 빨래를 마쳐 건조대에 걸어두고 점심으로 먹을 짜파게티를 끓여 김치에 먹고 있으니 J커플이 도착했다. 동키로 보냈다던 그들의 가방도 비슷하게 도착했고, 난 드디어 내 파우치를 이틀 만에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감사한 마음을 담아 마트에서 산 와인 한 병과 난 이제 먹지 않는 베드 버그 약을 드리고서 설거지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뭔가 구경할만한 유적이 있는 마을은 아닌 것 같아 오랜만에 마음껏 휴대폰 하면서 낮잠도 자고 일어나서 멍 때리고 있는데 J커플이 밥을 같이 먹자고 제안한다. 리셉션에 내려갔더니 그분들 말고 다른 한국분들도 세 분이나 더 계셨고, 내가 짜파게티를 끓이던 조촐한 부엌에는 커다란 솥 두 개 가득 닭볶음탕이 바글바글 끓고 있는, 그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 한국식 닭볶음탕의 칼칼한 맛을 도대체 어떻게 낸 건지 짐작도 안되었다. 푸석한 이곳의 쌀이 맛있게 느껴질 정도라 솥 바닥까지 기울여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재료비는 한사코 안 받으려 하셔서 설거지를 다른 한국분들과 나눠서 같이 하고 멜론도 먹고 삶은 계란에 서로의 얼굴을 그리며 놀았다. 해가 저물어 가길래 빨래를 걷어오다 문득 노을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을 광장 쪽으로 걸어 나가 잠깐 노을 보며 산책하고 돌아왔다.
5인실인 침실에 한국 사람만 4명이 들어와 있어 한쪽에 놓인 작은 테이블 주변에 모여 앉아 와인에 팝콘을 먹으며 수다를 좀 떨다 다 같이 잠들었다.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