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디소-오페드로우소(22km)
술 때문인지 담요 때문인지 새벽에 한 다섯 번은 깬 것 같다. 공용 담요에 베드 버그가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경고를 계속 받았지만 비 오는데 침낭 꺼내기가 귀찮아 침대에 있는 담요를 그대로 쓴 게 문제였을까. 눈썹 언저리에 있던 벌레를 잠결에 잡았는데 피는 못 봤지만 왠지 찝찝해서 이불을 멀찌감치 치우고 옷을 덮고 옹그리고 자기도 했다. 깨다 말다 하다가 6시 5분에 일어나 스트레칭을 조금 하고 1층 욕실에 내려가서 씻고 준비해서 올라와 다시 짐을 챙겨내려갔다.
바에서 데사유노(아침) 하나 시키고 한쪽에 앉아 짐을 쌌다. 어제의 부실한 저녁 식사에 이어 서빙된 아침은 4유로라는 가격을 의심케 했는데, 토스트 두 조각에 오렌지 주스와 커피 한잔씩이 전부였다. 3유로 정도에 무한 리필되던 지난 알베르게들을 생각하니 이 가격을 받는 게 조금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거라도 먹지 않으면 아침 걷기가 몹시 곤란하다. 어제 알베르게에서 꼼짝도 안 하는 통에 마을 식료품점에서 다른 먹을 것을 구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난 최대한 빵가루 하나 흘리지 않고 접시를 박박 긁다시피 먹어치웠다.
그렇게 길을 나서는데 아침부터 안개가 대단하다. 다음 마을인 아르수아까진 차도와 인도가 같이 있는 길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로등도 거의 없는 길이라 멀리서 드문드문 보이는 다른 순례자의 랜턴 빛으로 대충 저기쯤으로 향하는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르수아는 리바디소보다는 큰 마을이었다. 다른 순례자들로부터 '아르수아는 별거 없다'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굉장히 현대적인 느낌의 마을이라 그런 말이 나온 듯싶었다. 뿌연 안개 덕분에 조금은 몽환적인 느낌이라, 나에겐 약간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날 거 같은 도시처럼 보였다. 이곳에서 묶은 순례자도 많은 듯, 건물 곳곳에서 배낭을 맨 채로 길을 나서는 사람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 이른 새벽부터 문을 연 바들은 리바디소와 아르수아에서 출발한 순례자들로 꽤나 북적였고, 가성비가 나쁘긴 했지만 그래도 아침을 먹은 나는 아르수아의 바들을 지나쳐 계속 걸었다.
그 뒤로 2시간을 더 꼬박 걸어 9시 10분쯤 멀리 백파이프 연주가 들리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카페에 도착했다. 나무의자와 낮은 테이블들이 놓인, 앉아서 한참 수다 떨다 가야 할 듯한 분위기의 카페였지만 나에겐 그저 두 번째 아침밥을 먹을 식당이었다. 커피가 1유로, 페스츄리 빵이 2유로래서 5유로를 냈는데 2.5유로를 돌려준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니 오늘 빵이 좀 작게 나와서 그렇게 받겠다고 한다. 나야 땡큐죠! 씩씩하게 그라시아스라고 말하고 음식을 받았다. 카페 콘 라체(까페라떼)가 1유로길래 좀 신기했는데 갓 내린 에스프레소가 아닌 보온병 속 드립 커피에다 또 다른 보온병 속 우유를 말아(?) 주는 걸 보고 싼 이유가 이거였나 싶었다. 다행히 맛은 나쁘지 않아 빵과 커피를 다 먹고 화장실도 들렀다가 카페를 나섰다.
아스라이 들리던 백파이프 연주는 카페에서 살짝 떨어진 길가에서 연주자들이 돈을 받고 해주는 연주였다.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을 하면 슬쩍 돈을 달라는 눈치를 주는걸 멀찌감치서 보고서, 촬영하려고 꺼낸 휴대폰을 슬그머니 내렸다. 조금 더 걸으니 이번엔 숲 한가운데서 피리를 부는 남자가 있다! 수염을 기르고 얇은 옷을 입고 앉아서 피리를 연주하며 연주 팁을 받고 있었는데, 연주도 꽤나 잘하는 것처럼 들렸다.
안개 가득한 숲길을 계속 걷는다. 아마존 같기도 하고 곶자왈 같기도 한 길과, 가끔 나타나는 마을과, 점점 영어 메뉴판이 많아지는 바들을 지나치길 2시간여, 이쯤에서 쉬어야겠다 결심한 바에서 오랜만에 D를 만났다. 팜플로나에서부터 까미노 초반에 많이 마주치다 중반 이후로는 거의 못 만났는데, 중간중간 한 도시에서 연박도 하고 쉬면서 온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다들 큰 도시에선 연박도 하고 그러던데 나만 연박없이 쭉 걸었나 보다. D는 다 쉬고 떠나는 참이라 먼저 보내고, 나는 바 앞의 야외석에 앉아 또르띠야 하나를 시켰다. 갈수록 가격이 비싸진다. 빵을 별도로 구매해야 하는 또르띠야 하나가 3.5유로라니! 발을 말리며 접시를 싹싹 긁어먹고 마지막 힘을 내서 길을 나섰다. 조금밖에 쉬질 못해 그런지 발이 꽤나 오래도록 아파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오늘 묶을 마을 오 페드로우소는 엄밀히 말하면 까미노 길 위에 있는 마을은 아니고 아주 살짝 비껴나있는 마을인데, 그래서인지(?) 나는 정신줄 놓고 걷다가 마을로 들어서는 샛길을 놓칠뻔했다. 다행히 많이 지나치진 않아 다시 되짚어가서 마을로 들어갔는데, 이번엔 알베르게를 찾는 게 문제였다. 구글 지도상에선 분명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알베르게 자리라고 하는데 정작 눈앞엔 작은 단층 가게들만 보였다. 가게 직원에게 물어보니 300m 정도 더 가야 하는 알베르게라고 하고, 또 다른 가게 직원은 길 건너편이라고 하고... 말이 다들 제각각이라 일단 길부터 건너봤는데, 길을 건너고 나서야 아까 내가 있던 그 낮은 단층 가게들 뒤쪽 언덕에 자리 잡은 큰 건물, 나의 알베르게가 보인다. 작은 가게들 마주치기 전에 그 알베르게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는데 내가 지나쳤었던 것이다. 다행히 300m를 더 가서 확인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알베르게에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늦은 점심거리를 사냥하기 위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DIA(스페인의 마트 체인)로 향했다. 내가 묶는 알베르게의 키친이 예상외로 작았고 조리가 불가능할 거 같아 점심으로 라면을 먹으려던 계획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전자레인지는 구비되어있어서 레인지 조리용으로 나온 닭고기 감자볶음과 저녁으로 먹을 피자와 와인, 빵 맥주 등등을 샀다. 계산대에 섰는데 갑자기 카드가 안된다는 제스처를 하며 스페인말로 뭔가를 말했다. 카드 기계도 있고, 예전에도 다른 많은 DIA를 가봤지만 카드를 거절하는 건 처음이라 당황하며 다시 카드를 내밀었지만 카드는 꽂아보지도 않고 한숨을 푹푹 쉬며 안된다고만 한다. 지나가던 아저씨가 영어를 할 줄 알았는지, 나에게 '현금, 카드 말고 현금' 하고 말하는데..... 저도 알아들었거든요....? 내 뒤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 눈치도 보여서 그냥 지갑에 꼬불쳐둔 현금 10유로를 내밀고 말았다. 이렇게 나의 지폐는 모두 사라졌다..
인종차별인지 카드 거절인지 아니면 둘 다 였는지 알 수 없는 봉변을 당하고서 숙소로 터덜터덜 걸어오며 현금인출기가 보이길래 슬쩍 가봤는데 수수료만 4.5유로였다. 바로 캔슬하고 다시 터덜터덜 걸었다. 한 푼이 아쉬운데 수수료로 5천 원 넘는 돈을 낼 순 없다. 이제 내 수중에 남은 현금은 3유로. 내일 오전은 이 3유로로 버텨야 한다. 내 카드를 거절한 직원 욕을 한국어로 조용하게 웅얼거리고 숙소로 돌아왔다.
안개 가득한 아침과 달리 하늘은 어느새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알베르게의 마당에 마련된 테이블과 의자에 앉아서 닭고기 감자를 레인지에 돌려 맥주와 와인과 같이 먹으니 생각보다 맛이 그럴듯하고 괜찮았다. 부모님과 영상통화도 좀 하다가 내 방 침대로 들어가 낮잠을 조금 잤다.
낮잠 자고 일어나선 저녁밥으로 냉동피자를 돌려먹었다. 자고 일어나서 먹는 모습만 보면 영락없는 한량의 모습이다. 레인지에 피자를 돌려놓고 나서 포장지에 쓰인 스페인어 설명을 천천히 번역기로 돌려보니 동봉된 체다 소스를 같이 뿌리고 돌리라는 설명이 있어 황급하게 다시 꺼내서 소스를 뿌리고 마저 돌리는, 사소한 사건이 있었다. 처음 샀을 때만 해도 피자가 좀 많은 건가 싶었는데 먹다 보니 다 먹어진다. 점심때 먹고 남은 와인도 남김없이 다 먹어서 딱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와인 1일 1병의 업적을 이룩했다.
내일이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 길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아직도 안 믿긴다. 진짜 이게 끝난다고? 계속 걷고 싶기도, 그만 하고 싶기도 한데, 왠지 벌써 눈물이 날 것 같다. 푹 자고 일찍 일어나 걸어야지.
내일도 파이팅.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유튜브에 영상도 있어요
>>>>https://youtu.be/W0fUpBMmm8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