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아 -모르가데(10km)
눈을 뜨니 7시 48분이었다. 평소라면 이미 짐을 다 챙겨서 숙소를 나설 시간이지만 오늘은 늦잠이다. 6시 알람이 울린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는 휴대폰은 내가 잤던 1층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새벽잠이 좋았던 순례자가 기상 투정(?)을 한 모양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천천히, 조금만 걷는 날이다.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주는 '완주 증명서'가 있다. 그리고 그 '증명서'는 100km를 기준으로 본다. 프랑스길의 루트는 생 장 피드포르에서부터 약 800km지만, 인증서를 받는 건 산티아고 직전까지 100km를 걸으면 된다는 말이다. 휴가가 짧거나, 아니면 신체 조건 때문에 장기간 걷는 것이 힘든 많은 순례자들이 이렇게 100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하곤 한다. 그리고 내가 묶었던 사리아는 산티아고에서부터 약 111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다.
한 마디로 짧은 순례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지점이라는 뜻이다.
이곳에서부터는 모든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중 순례자가 넘쳐난다. 물론 난 산티아고까지 남은 5일 정도의 모든 숙소를 다 예약해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사람이 너무 많이 붐비는 숙소나 도시엔 묶고 싶지 않았다. 꼬박 한 달을 쉬는 날 없이 조금씩이라도 걸으면서 나는 내 안의 고요한 순례길을 완성해가고 있었고, 사리아에서 새로 순례를 시작하며 들떠있을 사람들 틈에 걷는 것이 몹시 어색할 것 같은 이유였다.
사리아에서 출발해 가장 많이 묶는 마을은 약 23km 떨어진 포르토마린이었다. 평소 걷는 루틴이었다면 그곳을 오늘의 목적지로 삼았을 테지만, 사리아에서 출발한 엄청난 숫자의 기존 순례자와 신규 순례자가 몰릴 것 같다는 생각에 포르토마린과 좀 떨어진, 사리아에서 10km 정도 떨어진 모르가데라는 마을에서 묶기로 결심했다.
몇 번의 경험으로, 너무 일찍 숙소에 도착하면 알베르게 문을 열지 않아 어차피 기다려야 해서 오늘은 아예 늦게 출발하기로 다짐을 했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곤 해도 8시가 다 된 시간에 일어날줄은 몰랐지만.
어제 함께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던 한국 순례자들은 이미 모두 떠난 상태였고, 알베르게엔 늦잠 자고 일어난 나를 향해 미묘한 공감의 눈빛으로 '굿모닝' 해준 외국 순례자 한 명과, 이곳에 있다는 문어 맛집에 들렀다 가려고 오픈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라는 한국 순례자 두 분과 나뿐이었다.
천천히 짐을 챙기고 나와서 근처에 있던 바로 들어갔는데 메뉴에 '프렌치 오믈렛'이 있길래 신기해서 시켜봤다. 나온 것은 두꺼운 지단, 덜 말린 계란말이 느낌의 계란 요리였다. 프랑스 사람들도 많이 걷던데, 이걸 보면 어떤 반응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서버가 요리를 주고 가면서 '쌀?'하고 묻는다. 쌀, 어디서 들어봤는데..... 맞다. 소금이 쌀(Sal)이었지! 뭔지 모를 본능에 Si (네) 하고 대답하니 소금통을 가져다주었고, 소금 없이 한 조각 잘라서 먹어본 계란은 역시나 싱거웠다. 물어봐준 서버에게 감사하며 소금을 뿌려 낯설지만 익숙한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갈리시아 지방이 비가 많이 오고 안개가 짙기로 유명하다더니 정말 아침부터 안개가 가득하다. 갈림길에 있는 살바도르 성당을 슬쩍 구경하고, 어제 봤던 막달레나 수도원 쪽으로 이어진 까미노를 시작했다. 어제 사리아로 들어올 때는 엄청난 오르막에 단전에서부터 분노를 끌어올려 걸어 올랐는데, 수도원을 지나 사리아를 빠져나가는 길은 또 엄청난 급경사의 내리막이다. 이제까지 묶었던 도시들 중 가장 급 경사의 언덕에 있는 도시였던 거 같다.
철길 옆을 지나 걷는데 정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딱 한 달 전, 생장 피드포르에서 출발할 때 느꼈던 마라톤 시작 지점의 느낌이 다시 생각이 날 정도였다. 심지어 9시라는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옅은 안개 저 너머로 화려한 컬러의 등산 가방을 멘 뒷모습들이 점점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처럼 조금 늦게 사리아를 떠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혹은 그 전 마을에서부터 걸어왔던 사람들일 수도 있었지만, 이래서 역시 사리아부터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하는구나 싶었다.
안개가 생각보단 짙었고 혼자 걸었다면 약간 음침한 느낌이 들게 무서웠을 길이었지만 잔뜩 흥분한 순례자들이 재잘거리며 걷는 통에 무섭기는커녕 어지간한 길치라도 길 잃어버리기가 힘들 것 같았다.
새 운동화, 새 배낭, 새 등산복.... 누가 봐도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사람들의 뒷모습을 왠지 뿌듯하게 바라보면서, 한 달 전 내 모습도 저랬을까 생각하다 외국인 순례자 한 명과 인사하면서 같이 걷게 되었다. 차림이 멀쑥해서 그 사람도 사리아에서부터 걸은 순례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프랑스 어딘가에서부터 꽤나 긴 거리를 걸어온, 스페인 사람 페드로라고 했다. 그는 세 번째로 걷는 까미노고, 같이 걷던 친구는 부상을 당해 레온에서 멈추고 자신은 혼자 계속 걷고 있는 거라고 말했다. 나도 영어를 엄청 잘 하진 못했지만 페드로도 영어엔 굉장히 자신감이 없어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등산복 브랜드 이야기나 갈리시아 지방에서 보이는 전통적인 창고 이야기 같은 이야기를 생각보다 많이 나눴었다.
어느 조용한 마을의 꽤나 큰 바에서 두 번째 아침을 시켜 먹으려는데, 페드로가 내 대신 돈을 내주려고 해서 격렬하게 뜯어말려야 했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았지만, 외국에서, 특히 남자의 호의를 함부로 받으면 위험하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사람 같아 보였지만 그것만으로 밥값을 빚지고 싶진 않았다.
같이 밥을 먹고 발도 말리고서 다시 길을 나선 지 얼마 안 되어 작은 마을 하나를 또 지나치는데 웬 아주머니 한분이 나지막한 담벼락 안쪽에서 호리병을 손에 든 채로 뭐라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약간 곤란한듯하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은 그 얼굴 표정만 보고 난 누군가가 그 호리병을 잃어버렸나 걱정했는데 페드로가 그 호리병을 돈을 주고서 받더니 나에게 건넨다? 이게 뭐지? 하는데 페드로가 그거 선물이라고, 나에게 가지라고 한다.
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카나리아 제도에서 무역회사를 운영한다더니 정말 부자였던 건가? 선물의 목적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는 이미 사버렸고 그 아주머니는 담벼락 너머로 사라졌으며 사실 하나 갖고 싶던 아이템이기도 해서 선물로 감사히 받기로 했다. 물론 이 모든 마음을 'Thank you' 한마디로 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슬프긴 했지만.
바로 다음 마을이 내가 묶는 마을이었다. 마을이라기엔 정말 알베르게 하나와 집 몇 개만 있는, 오가작통법에나 어울릴법한 동네였지만 그 하나 있는 알베르게가 오늘의 나의 숙소였다. 문 앞에서 페드로와 작별인사를 하고 바 한쪽 구석에 앉아서 체크인을 기다렸다. 내가 첫 알베르게 손님이었지만, 바도 겸하고 있는 알베르게라 바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어서 주인은 계속해서 나에게 미안하니 기다려달라는 눈짓을 해야만 했다.
가까스로 체크인을 마치고 내가 1등이라며 침대를 고를 수 있게 해 주길래 내 방의 가장 안쪽에 있던 침대를 골랐다. 2층 침대 없이 다 단층 침대라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첫 번째 순례자라 기다릴 필요도 없이 편하게 샤워하고 빨래하러 1층으로 내려왔다. 모처럼 일찍 체크인해서 시간 여유가 있을 거 같아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해서 잠옷을 포함한 옷 무더기를 세탁하기로 했다. 일반 알베르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텔 업무도 겸하고 있는지 세탁기를 셀프로 사용할 순 없고, 사용료를 지불하면 직원이 대신 돌려준다고 한다.
왠지 함께 세탁을 돌리면 물이 빠질 것 같은 보라색 상의는 따로 빨아서 건조기만 쓸 거고, 나머지 옷은 세탁 후 건조할 건데, 그중에 등산복 바지는 먼지가 많이 묻어있어 내가 이미 애벌빨래를 해서 젖어있는 거라는 복잡한 주문을 영어와 손짓 발짓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한 후 침낭과 배낭, 어제 비에 젖은 운동화와 깔창을 사위어가는 햇볕 아래에 말렸다.
빨래는 돌아가고 젖은 물품이 마르는 동안 바 안쪽에 있던 널찍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닭구이에 샐러드, 감자튀김으로 이루어진 한 접시에 맥주까지 시켜서 먹고 있으니 어느새 건조까지 끝난 빨래를 건네준다. 침대에 앉아 빨래를 정리하면서, 아무래도 어젯밤에도 베드버그에 물린듯한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 침낭에... 내 짐에 이미 베드버그가 들어온 것일까?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뒤뜰 햇볕에 널어둔 침낭을 순례가 끝나는 대로 버리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건조기로 뜨겁게 옷을 말렸으니 일단 그 짐들에 베드 버그가 있었어도 박멸되었을 거라고 확실치 않은 안심을 해보았다.
숙소의 다이닝룸으로 보이는 살짝 파인 반 지하 한쪽엔 벽난로가 있었고 그 앞엔 소파와 의자들이 조금 배치되어 있어서 순례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단차와 몇 가지 소품들로 경계를 친 한쪽이 레스토랑이라 난 벽난로가 가장 잘 보이는 레스토랑 의자에 앉아 저녁을 주문했다.
사이에 참치가 들어간 참치 파이와 두께가 적당해서 맛있게 구워진 돼지고기 스테이크와 기대 없이 먹었다가 굉장히 맛있었던 초콜릿 푸딩까지, 와인 반 병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하고 맛있는 식사였다. 9유로라는 가격이 이렇게 합리적으로 느껴진 건 오랜만이다. 그동안 정말 잘 못 먹고 다녔던 걸까. 저녁 먹고서 커다란 통창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을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앞으로의 예약 현황을 확인해보니 거리 배분이 엉망인 구간이 있었다! 황급히 연락해서 취소하고 다른 알베르게로 다시 예약했다. 이제부터 25km 넘는 일정은 없다! 내일은 잘 걸어야지. 오늘 푹 쉬었으니까.
>>>>>>>유튜브 영상도 있어요~